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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오지에는 여전히 빨치산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제 무장한 빨치산의 숫자는 적었고, 무장수준도 국군과 대적할 정도는 되지 못 했다. 군이 마을에 진입했을 때 빨치산은 곧바로 도망을 갔고 젊은 사람들은 군인이 두려워 무조건 피하였기 때문에 마을에는 노약자나 여성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371) 그러나 후방 빨치산의 존재 자체가 전쟁 수행 중인 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후방 치안 미확보는 정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때문에 토벌작 전은 전방의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1사단 지휘 관과 사병들은 빨치산의 위협이나 전투력을 과대평가했으며, 주민들이 이들 에 동조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위험성을 크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빨치산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간주하던 마을에 진주할 때 과도한 공포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 아래에서 대량의 민간인 집단희생이 발생하였 다. 따라서 호남지역의 일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점령기 공산군이나 수복기 빨치산에게 협력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그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좌익 주민’ ‘적색 주민’ ‘부역자 주민’으로 간주되는 등 사실상 빨치산과 동 일하게 취급되었다. 군경 측 참고인들은 “우리 병력이 없는 곳은 전부 인민 공화국입니다"372)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토별군이 빨치산 활동 ‘지역주민=빨갱이’라고 간주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미 전쟁 전후에 활동하던 군 지휘관들은 그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 다.11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일반 주민은 “공산당 전술에 의해 이용되는 존 재이며, 공산당 제거를 위해서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 다)73) 최덕신 사단장은 실제 1951년 초 거창사건이 폭로되어 11사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국방부에 올린 보고서에서 거창군 신원면 거주 주민 을 총살한 원언을 “남여노유를 막론하고 적정에 대하여 함구할 뿐만 아니라 식사 기타 금품을 제공하였다는 구실 하에 전기와 여한 비참한 민족사를 연 371) “토벌작전에서 민간인과 빨치산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산으로 도망가지 않은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군경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고, 그 때문에 마을에는 노약자들 만 남아서 가옥 소각 시 저항하는 주민들은 거의 없었다" 참고인 김충만 진술녹취조 서(2008.1 1.20. ) 372) 김필상 전화면담보고(2008.2.12) 37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덕신 증언록(HA03025) J . - 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