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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병들은 정치훈련을 덜 받은 부대이다. 새로 편성된 부대 ... 유격 전을 대규모로 하는 것이 우리 부대가 처음 ... 거기다가 지방의 실정이 모략중상이 심한데 넘어가기 쉬운 것이 군대이다... 토벌작전에 있어 서 하나도 다치지 않는 방법은 없다. 공산당이 저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다 ... 우리의 고충인 동시에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후세가 인식 해 주어 야 ... "341) 이러한 견벽청야작전 개념은 예하부대의 대대장 중대장 급 지휘관들에게 전달, 교육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의심되는 주민처리에 대한 광범위한 자율 권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집단희생을 낳게 되었다. 견벽청야 작전을 하달 받은 예하 부대원들의 진술을 살펴보면 이 작전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일반사병들에게 견벽청야란 마을을 통째로 불사르고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도 무방한 작전으로 인 식되었으며, 따라서 일반 주민의 희생은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산간마을에 세대수가 많지 않았어요. 보통 5-10세대 정도였거든요. 그런 마을에 가면 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빨치산이란 말입니다. 거기서 잡아가고 총으로 싹 죽여 버리고 남은 주민들은 읍으로 피난시키고. 불 도 질러야죠. 전부 소각시켜 버렸어요. 인민군들이 거기 와서 내 것 네 것 없이 다 잡아 먹었거든요. 불 지를 때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죠. 젊은 사람들은 다 빨치산이라고 총으로 싹 버리고 잡아가 버렸으니 노약자나 그런 사람 밖에 안 남았는데 그 사람들이 무슨 반항을 해요. "342) 실제 11사단의 토벌작전을 보면 각 부대는 호남지역 공비토별작전에서 ‘견벽’보다는 ‘청야’작전을 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군은 빨치산 거점 지역이거나 ‘통비분자’가 많은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은 다른 마을로 이주 시키는 소개 작전을 주로 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처럼 군이 사전에 소 개하라고 고지하거나 소개준비를 할 만한 여유를 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 부분의 경우 군경들이 빨치산 영향권 하의 마을에 진입하면서 마을 가옥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결시켜 임의 선별된 주민을 총살한 후 마을을 떠나 34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덕신 증언록(HA03025). 342) 김충만(1 1사단 20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소속 사병) 전화면담보고(2008.1 1.20.) - 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