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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을 임의적인 기준으로 선별하여 총살하였다. 그러나 실제 주민 중에 무장 한 빨치산이 숨어 있거나 주민들이 무장한 빨치산인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군인들이 마을에 진입할 때는 총을 쏘면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마을에 빨치산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군인들이 온다는 정보나 총소리를 듣 고 재빨리 피해버려 마을 주변에서 실제 교전이 벌어진 경우나 주민 중 일 부가 빨치산에 가담하여 군을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5. 견벽청야작전과의 장관성 국군 11사단의 공비토벌작전에 사용한 작전개념은 ‘견벽청야(堅뿔淸野)’로 집약된다.336) 이 방침은 사단장(최덕신)이 총참모장에게 보고한 작전결과보고 에서도 나타나고 있다.337) 이는 ‘지켜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하 게 확보하고 부득이 적에게 내놓게 되는 지역은 인력과 물자를 이동시키고 건물은 말끔히 치워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다. 최덕신 의 “100명의 공비에 대해서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338)라는 증언에서 보듯이 그가 명령했던 견벽 청야 작전은 제주 4.3, 여순사건 토벌과정에서 시행된 ‘초토 작전’과 유사한 것이었으며 많은 민간인 집단희생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았다. 최덕신은 견벽청야 작전이 빨치산이 산악지대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 태에서 지리적 · 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아군이 구사하는 작전이라고 전제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빨치산을 유인하는 작전이라고 주장하고 있 으나 전문가들은 이 작전이 ‘중국 대륙 같은 평야에서는 주효할지 모르지만 산간벽지에서는 큰 성과를 얻기가 힘들다고 주장’339)하고 있기 때문에 최덕 336) ‘견벽청야(堅뿔淸野)’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 때 하승천이 변경지역 방어를 위한 이론으 로 『안변론(安邊論).1에 나오는 말인데 “성(城) 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 키면서 적이 오길 기다린다(堅뿔淸野 以後其來)"라는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i"우리말큰 사전.1, 두산동아, 1999.(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1, 사회문화원, 2001, 50쪽에서 재인용) 337) 보11사작교을발제22호(1951.4.10), i"한국전쟁사료.1(59권), 1987, 172쪽 ; 20연대는 「호남지 구 공비 토별작전 보고」에서 “청야견벽 전법을 사용, 각지에 출몰하는 적을 구하여 철 저한 포착 섬멸작전을 개시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육군본부, 『한 국전쟁사료(59권).1, 1987, 921-1081쪽. 33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덕선 증언록(HA03025) J . 339) 중앙일보사(편), i"민족의 증언 4.1, 193쪽. - 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