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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주 총살되었는데 이날 92세 답동리 신기마을에서도 피난하지 30여 명이 20연대 1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천치재’에서 대부분이 피난하지 못한 노약자와 임산부 어린 아이들이었다)25) 1951년 1월 26일 순창군 복흥면 민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32이 남창마을 주민희생 사건에서도 마을에 진입한 여아, 임산부가 포함된 부녀자 4명이 죽임을 당 이동필도 집 앞에서 군인의 1950년 11월 발생한 장성군 무차별 사격으로 3세 의 군인의 했다)27) 또한 환자들이 다수 돌아 거동하기 어려운 장티푸스가 순창지역에서는 못하 따 겪 을 적 놔 이문 50세 이 마을 소각 때 빠져나오지 고 불에 타 사망한 사례도 확인되었으며, 군인이 집을 동사한 사례도 확인되었다. 이들 희생자들이 ‘빨치산 및 으로 가담하였다고 볼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또한 1950년 12월 9일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에게 사살된 나산면 리 희생자를 보면 신원이 확인된 10명 중 64세의 김기복을 포함해 태워버려 좌익 활동에 있었다. 장티푸스 환자들이 군인의 존재하고 일곱 살짜 15세 이하가 3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1명은 20세의 여성이었다. 군인들이 명단을 보 진술과 희생자들이 노인과 아이들이었다는 부역혐의자가 있어 그를 대신하여 남은 가족이 상인 주민이 모두 6명이었고 리 어린이도 있었으며 나머지 며 이들을 불러냈다는 목격자의 점에 비추어 보면 가족 중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남원 대강면 강석마을 사건처럼 미 L 주 ’ 가 진입했 급히 진입해서 을 집결, 살해한 경우 사망자 중에서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장, 여맹위원 장, 빨치산 활동을 하던 사람이 몇 명 포함된 경우가 있었고, 90여 명의 희 생자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청장년 남성의 경우 인민군 점령 하에서 그들 의 협력요구에 적극, 소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수의 참전 군인들은 당시 작전 때문에 마을에 을 때 빨치산 부역혐의가 있거나, 국군의 무차별적인 총살 소문을 들었던 청 마을에 국군이 325) 한국전쟁사료에도 1951년 1월 26일 20연대 1대대가 복흥면 백방산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59권), 1987, 1061쪽. 326) 참고인 박성욱 진술조서 (2008.1.30.); 신청인 이석남 진술조서(2008.1.30. ); 참고인 김재형 진술조서(2008.8.21.); 참고인 윤용호 진술조서(2008.8.21.) ;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이 동필(당시 92세), 박남순(여 · 당시 9세), 김윤화(여 • 당시 56세) 등 3명이다. 327) 신청인 지명환 진술조서 (2007. 5. 29.) - 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