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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은 국군이 빨치산, 혹은 부역행위자로 보기 어려운 상당수의 저항능 력이 없는 민간인을 살해한 사실을 증명해 준다. 노약자를 무차별 살해한 대표적인 경우가 함평사건인데 1950년 12월 6일 새벽 벌어진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 · 통촌마을 사건에서는 5중대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결 시켰다. 군인들은 모인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0여 명을 사살하 였다. 이들 중에는 갓난아기 2명과 15세 이하가 4명이 포함돼 있었다. 1950년 12월 31일 발생한 함평군 해보면 쌍구룡에서도 5중대원들이 성대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에 불을 지르며 “죽지 않으려면 모두 나오라”고 하여 쌍구룡으로 집결시킨 후 20여 명의 주민을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살한 사건 이다. 이날 희생된 주민 대부분이 인근 마을인 광암리에서 군경의 명령으로 소개되어 온 사람들이었다)22) 신원이 확인된 23명 중에는 1세의 영아 2명, 11세 이하의 어린이 5명, 72세의 이석여를 비롯한 50세 이상 노인 4명 등 여 성 이 12명 을 차지 했다.323) 1951년 2월 20일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용천사지역에서 벌어진 2대대의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 소탕전’에서도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날 빨치산불갑산지구사령부의 빨치산은 국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퇴각하였으나 달리 피신할 곳이 없어서 빨치산이 활동하 던 거주지에 머물러 있거나 토벌군이 두려워 빨치산 지구로 피난 온 주민 등 함평, 장성, 영광지역 주민들이 토벌군의 총격에 희생되었는데 10세 이하 와 51세 이상의 주민이 29%를 차지하였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불갑산지역 희생자 유해발굴에서도 유해와 함께 두개골 바로 옆에서 비녀, 빗, 거울, 구슬 등 민간인들의 생활용품이 다수 출 토되어 상당수의 유해가 여성 노인으로 추정되었다)24) 322) “성대마을에는 원래부터 살던 사람 중 부유층은 광주로 미리 피난을 가 빈집이 많았 다. 이러한 빈집에 불갑산 밑에 살던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경찰이 낮에 와서 빨치산에게 부역을 하였는지 등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신청인 김형술 진 술조서(2006.7.1 1.); “처음에는 군경가족조차 선별하지 않았는데 한 주민의 항의로 중간 에 군경가족을 골라냈다" 신청인 박용원 진술조서(2006.7.12.) 323) 1960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위원회 조사에서 당시 대창리 이장 김성묵은 대창 리 원주민 11명과 광암리에서 소개된 피난민 40명이라고 진술하였다. 제4대 국회 양민 학살사건진상조사위원회속기록(전남반), 9쪽, 1960.6.8. 324)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조사단, iJ 2009 유해발굴 중간보고 자료집~, 2009, 28쪽. - 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