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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피신생활을 하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혀 3명이 총살되었다.299) 1950년 12월 19일 남원군 산내면 백일리 주민 김동일(청각장애인)은 “손을 들라”는 군인 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택 앞에 서 있다가 총살되 었다,300) 또 1950년 12 월 20일 순창군 쌍치면 전암리에서는 토벌군이 마을에 불을 질러 고령의 시 각장애인 황희도(당시 80세)가 소사(燒死)하였다,301) 순창군 쌍치변에서는 1951년 1-3월 장티푸스를 앓아 거동이 어려운 주민 20여 명이 국군의 마을소각 때 불에 타 죽은 사건이 잇따랐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노약자나 어린이들이었다. 희생자 중 순창군 쌍치면 탕곡리 주민 8명 을 비롯, 용전리 4명, 옥산리 3명, 전암리 1명, 둔전리 1명, 운암리 1명, 도고 리 1명 등 19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302) 또 1951년 3월 18일 담양군 창평면 (당시 남면) 외동리에서는 85세의 맹인과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20연대 1 대대가 마을에 지른 불에 타 사망하였다. 1951년 2월 7일 화순군 남면 주산 리 주산마을에서는 20연대 3대대 9중대가 집 안에 남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 하지 않고 채 불을 질러 거동이 불편했던 64세의 노인이 집 안에서 불에 타 사망하였고, 5살 난 여자 어린이가 밤에 잘 곳이 없어 개울가에서 밤을 보내 다가 얼어 죽기도 하였다,303) 군경의 공비토별작전이 본격화되자 미수복 지역의 주민들은 군경이 빨치 산 영향권 내의 주민들 특히 청장년들을 총살한다는 소문이 퍼져 남녀노소 를 불문하고 이불까지 젊어진 채로 야산으로 피난을 다닌 경우가 많았다. 특 히 주민들은 빨치산 유격지구로 몰려들었는데 이유는 무차별적으로 벌어지 299) “사건이 있기 전에 마을은 이미 불태워졌는데 밤손님들이 우리를 못 나가게 했다. 낮이 면 군경이 소개 나가라고 그렇게 얘기 했지만, 밤손님들이 무서우니까 나가지 못하고 천막치고 살았지. 그때는 밤이면 빨치산이 피난가야 한다고 그랬고, 낮이면 군인들이 소 개 나가야 산다고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던 때였다" 참고인 이장환 진술조서 (2008.4.2.) 300) 참고인 노순남, 변담보고(2008.2.21; 목격자); 참고인 오옥순, 면담보고(2008.2.21.) 301) “피난을 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마을이 불 타고 있어서 불을 끄고 살펴보니 할아 버지가 불에 타 오그라져 죽어 있었다” 참고인 황기봉 진술조서 (2008.1.16.) 302) “당시 마을에 장티푸스가 돌아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병 에 걸렸다. 인민군 점 령 기가 끝나고 국군이 토벌작전을 시작하면서 병이 돌기 시작했는데 열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 이 열 명에 한 병 정도였다" 신청인 김종진 진술조서(2008.1.17.); 참고인 김순진 진술 조서(2008.2.21.); 신청 인 설순기 진술조서(2008.1.16.); 참고인 이상묵 진술조서(2008.9.4.); 참고인 김장수 진술조서 (2008.10.17.), 신청인 홍언표 진술조서 (2008.2.18.); 학도의용경찰 로 20연대 1대대 4중대원과 함께 순창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던 참고인 윤정호도 “51 년 초부터 장티푸스가 돌고, 피아(彼我)간 구분이 어려워 국군뿐 아니라 빨치산에게도 민간인의 희생이 컸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윤정호 진술녹취록(2008.9.1.) 303) 참고인 김태균 진술조서 (2008.7.24.) - 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