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page

따라서 한겨울에 아무런 대책 없이 소개조치를 내리더라도 주민들은 달리 피신할 곳이 없었다. 주민들은 마을이 불 탄 후에도 신변의 위험, 마땅한 이 살다가 받아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또 식량을 구하러 고향집에 왔다가 군경에게 광암리의 경우처럼 소개 조치되어 다른 등에 문제로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움집 오인 수색과정에 발각되면 빨치산으로 소개되었다가 숨겨둔 있었다. 또한, 함평 등의 주지, 농사와 가축관리 마을로 경우도 군의 다른 희생된 곳에서 피신하여 았다가 희생된 주민도 있었다. 즉 일부지역에서는 현지 군 지휘관이 주민들에게 소개조치를 내린 것으로 주민들이나,신체 남아 있었던 마을에 못하고 듣지 전해 보이나,그것을 ,_ - ,_ 。} Hλ 이동할 수 소개조치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다른 곳으로 이유 때문에 적인 표적이 소개조치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판단, 무조건 사살해 버리는 일이 적 총살의 무차별 취급되어 적으로 되 기도 했다. 즉 토벌군은 자신들이 남아있는 주민은 빨치산과 내통한다고 눈에 띄어 군경의 노약자들이 。j t::-i λνκ -.....:. 지 않았다.5중대 참전 군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안한 “고참군인들로부터 주민들이 소개하라고 하는데 주민들이 소개를 다, 빨치산과 내통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고, 이들이 마을 주민을 죽였 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97) 군 20연대 2대대 후에도 이주하지 국군에게 붙잡혀 1950년 12월 7일 장성군 삼계면 발산리에서는 소각되 었다. 주민들은 마을이 소각된 모여 있다가 다음날 다시 들어온 그 외에도 인들에 의해 마을이 못하고 타지 않은 집에 20여 명이 마 러 } 지 으 1 「 드 E ‘ / 인 을 군 랴。 는 시「 들 민 ZT 무동리 담양군 12월경 살해되었다. 1950년 11일 1951년 2월 피난을 나갔는데 남면 지독리로 뾰 각 잃 총살되었 11월 해보면 상독리 모평마을의 경우 일부 소개 피난민들이 식량 등을 조달하기 위하여 드나들었는데, 5중대는 이를 빨치산 군인들에게 명이 10여 받아 오인 빨치산으로 갔다가 1950년 무동리에 다.298) 원 들어가 남아있는 주민을 총살하였다. 담양군 인암 소각된 후에도 빨치산의 경계가 심하여 이주하지 마을에 활동으로 의심하여 마을에 마을이 한 못 Zπ1 드E T 니 근_1.- 리 진술조서 (2006.7.6.) 김일수 진술조서(2008.9.22.) 297) 황학준 298) 참고인 - 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