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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동창교사건 1951년 1월 20일 발생한 나주 동창교사건의 경우 전사에는 이 사건과 관 련된 기록은 전무하다. 그러나 당시 함평군 해보면 학도연맹원 신분으로 5중 대와 함께 공비토벌작전에 동원되었던 정현모, 5중대 학도연맹원 이재문, 5 중대원이었던 김일호의 일치된 진술 등으로 사건의 실재 및 현장 가해부대 가 2대대 5중대였음이 확인되었다,287) 11사단은 6개월에 걸쳐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하였지만 전투 상보 등 각 지역에서의 구체적인 작전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그 중 몇 건에 불과하다. 당시 기록의 부실 탓도 있겠지만 고의적인 누락이나 은폐는 없었 는지 전사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확인 가능한 기록은 11사 단이 해당지역에 예하 부대가 주둔 혹은 출동한 사실, 일부 작전상황을 추정 할 수 있는 정도이다. 나아가 작전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고 기록된 자료는 전무하다. 국방부는 전사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군의 해당지역 작전사실을 부인할 뿐더러 민간인 희생사실은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설령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공비’이거나 ‘통비분자’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쟁기록 생산자이며 관리자인 국방부가 중대단위까지의 모든 전쟁 기록을 빠짐없이 보존 · 기록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고 또 군이 민간인 희생사건을 1건이라도 인정한 경우에 받아들 일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나주 동창교사건이나 함평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일대의 사건 은 각각의 희생규모가 수백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집단희생 사건임에도 이 와 관련된 작전기록이나 전사의 기록은 전무하다. 사살된 사람들이 ‘공비’였 287) “그때(나주 동창교사건) 작전은 공군 협조하의 사단작전이었다. 자갈밭에 모아놓고 사 람들을 죽였다. 월악리와 영산강변 작전 때 사람들을 사정없이 죽였다. 집집마다 돌아 다니면서 사람들 다 나오라고 해서 Ml으로 총살했다" 5중대장 연락병 출신 참고인 김 일호의 진술(2007.2.15); “이 사건 발생 직전에 5중대는 함평군 해보면의 중대본부에서 태청산, 내장산 등 장성 지역으로 작전을 나갔다가 영암 월출산에 출몰하는 공비를 토 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성 • 송정리 (1박/도보) • 나주시 영산포(1박/도보) • 세지 면(주민총살/1박) • (영산포 경유) 광주 20연대 본부’ 순으로 진주하여 주민들을 집단 총살 하였다" 학도연맹원 정현모의 진술녹음(2007.5.1.) - 8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