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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269) 우선 정부 및 군에서 편찬한 전사의 기록에는 주로 ‘공비’, ‘빨치산 사 살’ 전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목격자 진술을 통해 집단희생사건으로 확인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전사의 토별기록이 다수의 목격자 진술을 통해 집단희생사건으로 확인 된 경우 @ 함평사건270) 1951년 2월 20일 불갑산 토벌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한 국전쟁사료』와 『공비토벌사J Ii공비연혁』 등의 전사에 기록된 제 11사단 20연 대 2대대의 작전과정에서 발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271) 또한 실제 작전에 참전했던 수색소대장 유삼률, 사병 김성순·김인석·김정부의 진술, 구사일생 한 생존 주민 문만섭과 다른 목격자의 진술로 이날 작전과정에서 민간인 살 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272) 1950년 10월 22일부터 30일 사이에 수행된 국군 제 11사단 20연대 3대대의 함평 수복작전 상황은 부대역사일지, 정기작전보고(육군본부, 1950.10.), 미군 문서 등에 기록되어 있다.273) 한편 당시 3대대장이었던 김필상, 12중대장 김 용림, 함평경찰 출신 참고인, 목격자의 진술을 통해서 이 토벌작전에서 민간 인 희생이 발생했으며 사건 가해부대가 2대대와 3대대임이 확인되었다.274) 269) 제 11사단 사건 관련 전사는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료.JJ(l987-1988), i"공비토 벌사.JJ(1954), 보병 제 11사단의 『화랑부대전사.JJ(l986), i"화랑약사.JJ(l975), 보병 제20연대, 「보병20연대 부대 약력표J (1950-1951), r20연대 인사명 령(갑)철J (1951), 국방부전사편찬 위원회, 『대비정규전사.JJ (1945-1960) 정도이다. 270) 여기서 함평사건이란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한 ‘함평 수복작전 민간인희생 사건’, ‘함평 11사단 사건’,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 사건’을 모두 포함한다. 271) i"한국전쟁사료』에 수록된 「전투상보」에는 적 병력을 ‘3,500명(무장 500명, 비무장 3,000 명)’이라고 기록하였으나 『공비토별사』에는 ‘공비 350명’이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r제 11사단 20연대 2대대,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BQ7896) 일대 소탕전’(1951.2.20')J. 육군 본부, 『한국전쟁사료.JJ(59권), 1987, 1009쪽; 육군본부, 『공비토벌사.JJ, 1954, 50쪽 272) 목격자 정관전·김진현·장재수·오달근(이상 신청인), 오정인·임봉섭·정금용-김규영(참고 인), 빨치산 출신인 김영승 김진현 정호범의 진술이 일치하고 있다. 273) 육군본부, 「정기작전보고J , 1970. 10, 358쪽; 국군 제 11사단 20연대 3대대의 함평 수복 작전 관련 미군 문서 (1950. 10. 22.)(NA, RG 407, box 1766-1 20060504170958_00214.tif.) ; 제 11사단 20연대 3대대의 함평지역 전과관련 미군 문서(1950.10.27.) (NA, RG 407, box 1761-1, 20060502112249_00062.tif.). 274) 함평경찰서 의경이었던 임봉섭, 목격자인 정정희,노순례 정종순·장창환·김성수·오영종 - 8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