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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고 한다 25이 2) 재산장의 피해 당시 국군의 부식 보급 상황은 상당히 열악하였다. 부식이 나오기는 하였 지만 부족해서 중대가 토벌을 나갔다 오면 소를 몇 마리씩 잡아가곤 하였 다.251) 중대가 소를 잡아가려고 하면 민간인들은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 지만, 군인이 총을 몇 방 쏘고 나면 소를 주었다고 한다.252) - 북상면(현 북하면) 쌍웅리 사례 북이면 사거리에 주둔한 국군 20연대 2대대 7중대는 1950년 12월 하웅마 을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다. 당시 하웅마을 남쪽 송정마을에는 빨치산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당일 오후 1-2시 무렵 하웅마을 인근에서는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253) 목격자 김정님(당시 24세)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마을 뒷산에서 총소리가 한참 들리다가 조용해진 후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넷째숙부인 김용술(당시 38세)과 당숙 김동렬(당시 45세) 그리고 주민 이수만(당시 44세)과 박팔만(당시 35서11)에게 마을의 소 9-10마리를 끌게 하여 북이면 사거리 방향으로 갔어요. "254) 다. 사건 이후 생존자 및 유족의 피해 이 사건 희생자의 대부분은 산간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주민들이었다. 희 250) 참고인 정종주 진술조서 (2008.4.16.) 251) 참고인 유화인 진술녹취록(2007.12.12.) 252) 참고인 반삼모 진술녹취록(2008.9.9.) 253) “당일 오후 1-2시 사이에 마을 뒷동산에서 갑자기 총성이 20여 분간 울렸어요. "(신청인 김형윤 진술조서 2008.3.6.) 254) 참고인 김정님 통화보고서(2008.10.24); “당시 시동생 박팔만과 주민 김동렬, 이수만, 그 리고 월평양반(김용술)이 군인들을 따라 소를 몰고 북이면 사거리로 간 후 소식이 끊겼 다. 사망여부도 몰랐지만 설령 알았다고 해도 시신을 찾을 엄두를 못 내던 시기였다" - 8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