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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북면 임곡리 사례 화순군 북면 임곡리는 1950년 12월 25일 20연대 3대대 12중대가 마을에 진입하기 이전에는 100여 호가 살았지만, 이후에 군인들이 소개 작전에 의해 17호만 남게 되었다. “그때 군인들이 주민들을 월산리로 소개시켰어요. 근데 반란군들은 우리 한테 그리로 가면 죽으니까 자기네를 따라 오라고 그랬지요. 그 놈들이 선전은 기가 막히게 했거든. 그날도 군인들이 이서면 쪽에서 마을로 들 어오는데 우리는 산으로 올라가 굴을 파고 숨어 있었어요. 군인들도 산 으로 올라와 총을 쏘면서 또 손들고 나오면 살려준다고 소리치고 그랬 지요.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그 군인들을 따라 이서면으로 갔는데 우리 는 산에 숨어 있다가 군인들이 간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어요. 산에 서 내려와 마을로 가는 길에 보니까 시체 몇 구가 널려 있더군요.’'248) - 화순군 남면 주산리 김충식 사례 1951년 2월 7일 국군 20연대 3대대 9중대는 마을 소각과 주민소개를 위해 주산마을 뒷산을 통해 마을로 진입하여 포격과 총격을 가하였고, 집안에 남 은 사람이 있는지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불을 질렀다. “당시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서 전혀 거동할 수가 없어 집에 계셨는데,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질러서 그 불에 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 어머니와 누나는 밤에 잘 곳이 없어 마을 인근 개울가에서 밤을 보 냈는데 다음날 깨보니 누나가 얼어서 죽어있더랍니다. "249) 이외에도 담양군 창평면 외동리도 가옥을 소각하였다. 마을의 젊은 사람 들은 모두 산으로 피신을 한 상태였는데 몇몇은 아이가 울어서 숨은 장소가 발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는 내버려두고 숨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래서 당시 마을에는 장애인, 아이, 노인처럼 움직이기 힘들고 움직이다가 인 기척을 내기 쉬운 사람들 그리고 세간을 아쉬워했던 몇몇 사람들만 남아있 247) 참고인 황기봉 진술조서 (2008.2.21.) 248) 참고인 조은호 진술녹취록(2008.10.8.) 249) 참고인 김태균 진술조서 (2008.7.24.) - 8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