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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얘기였죠. 그래서 산으로 숨어들어갔는데 이 무장 빨치산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싹 빠져버리고 주민들만 남았는데,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 면서 거꾸로 언공기를 들고 들어왔답니다. 그렇게 산으로 와서는 동무들 다 나오라고, 같은 편이라고 하니까 주민들은 또 아무 생각 없이 산에서 내려왔겠지요. 그러자마자 갑자기 인공기를 찢고 태극기를 올리더니 사 람들을 몰아서 개울 건너 월곡마을 뒷산으로 데려가 모두 총살을 시켰 답니다. "216) - 함평 사건 1차 학살 후 생명을 부지한 주민을 색출하여 전원을 살해하기 위하여 기 망을 하기도 하였다. “1차 총격 후 살아남은 사람은 살려준다고 일어서게 한 후, 일어선 사람을 향해 2차 총격을 가했다. 나는 1차 총격에는 총을 맞지 않아서 살아있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일어나라고 할 때도 일어나지 않아서 총을 맞지 않았다. 그리고 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려주겠다고 일어서게 한 후 3차 총격을 가해서 모두 학살했다."217) 또 11사단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경종을 울린다는 이유’로 종종 공개총살 을 실시하기도 했다. 1950년 11월 7일 20연대 1대대 4중대는 담양읍 추성경 기장 건너편에서 함장수(당시 37세) 등 40여 명을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이유로 공개총살 하였다. 국군은 “공산당을 처형하니 와서 보라”며 담양읍 주민들을 동원시켰다.218) 1950년 12월 27일 순창읍 순화리 주민 10여 명을 막골너머재에서 총살한 사건에서도 국군이 주민들을 사건현장으로 불러 모아 현장을 지켜보게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 한영자(당시 10세, 순화리)에 따르 면, “대장으로 보이는 군인이 확성기로 ‘빨치산을 돕거나 좌익 활동을 하거 나 부역행위를 하면 이렇게 죽는다’라고 말한 후, 한 사람씩 포승줄에 묶인 216) 최홍주 진술조서 (2008.10.31.) 217) 신청 인 정 남숙 진술조서 (2006.5.17.) 218) 담양군지편찬위원회, 『담양군지.!I, 1980, 279쪽; 신청인 함종호 진술조서(2008.4.1ι 박인 덕 진술조서 (2008.4.1.) - 8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