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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빨치산 전북도당이 자리 잡았던 회문산 인근 쌍치면 · 복흥면 · 구림 남아 군경과 빨치산의 교전이 지속되다가 미수복지구로 산간지역은 면의 토별작전이 시작되었 본격적인 초순 20연대 2대대가 합류하면서 1951년 2월 다.163) 쌍치면 금성리 내동마을에서 우측에 회문산이 위치하여 빨치산의 들어오자 주민들은 총소리에 이아덕은 마을의 정황을 살 토벌작전 활동 2대대는 국사봉, 토벌군이 작전을 잦아들 무렵 11월 13일 20연대 금성리는 좌측에 지역이었다. 산으로 도망갔는데, 총소리가 1950년 폈다. 이 활발했던 라 놀 주민 총살되었다. 피러 산을 내려오다가 학도병에게 발각되어 빨치산과 부역자 색출을 위 혐의가 있는 주민들을 연행한 후 또한 순창읍에 진주한 20연대 1대대는 12월경 백산리, 순화리 등의 마을을 수색하며 공개 총살하였다. 무동마을로 작전을 나온 토벌군은 장티푸스에 걸 빨치산으로 의심하여 총살하였 주민 김용섭이 토벌군의 총격을 피해 국 빨치산으로 오인되어 총살되었다.164) 주민들이 불에 타 죽는 일은 쌍치면 탕 없던 주민 김식두를 병에 걸린 12일에도 장티푸스에 사봉 인근의 사리실 골짜기에 장티푸스로 인해 거동하지 걸린 숨었다가 못했던 1951년 2월 10일 옥산리 수’ 탤 월 거 3 려 고 움막 속에서 주민 김홍엽이 모두 불에 타 죽었다. 발생하였다. 1951년 1월 16일 탕곡리 23일에는 이춘화 일가 6명이 곡리에서도 불타 죽었고, 3월 이상묵은 “당시 장티푸스가 유행했는데, 장티푸스에 남아 있다가 군인 못하고 마을에 진술하였다.165) 미처 피난을 가지 죽거나 끌려가 죽었다”고 주민 사람은 타 한 씁 걸리거나 나이든 들이 지른 불에 시신을 163) 진실화해위원회, 「순창지역민간인희생사건J ,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3.n, 2009, 183 쪽;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n(59권), 1987, 1025 . 1088 . 1092 . 1097쪽. 164) 김용섭의 시신을 수습한 아들 김기곤은 부친이 봄 전체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은 채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순창지역민간인희생사 건J ,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n, 2009, 210-211쪽) 165) 진실화해위원회, 「순창지역민간인희생사건J, ~2008년 193-194쪽. - 852 - 2009, 조사보고서3.n, 하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