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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주 나주지역은 20연대의 주둔사실은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세지면과 다도면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은 확인되었다.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2월 22일 나주 다도면 판촌리 고마 · 동판마을에 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국군의 토벌작전 소식을 듣고 거동이 불편한 노 약자를 제외한 전 주민은 산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시 다도면 판촌리 고 마마을에 살았던 주민 박정래는 “토벌군이 온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 피난가고 아버지(박문갑, 45세)는 몸이 아파 집에 있다가 뒤늦게 마을 뒷산으 로 도망치다가 잡혔는데, 그때는 사람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총을 쏘아대서 군경이 온다 하면 모두 도망치기에 바쨌다”고 진술하였다.157) 1951년 1월 20일, 11사단 20연대 2대대는 세지면 동창교에서도 토벌작전 을 벌였다. 이날 오전 9시, 2대대 5중대원 100여 명은 경찰, 면장, 지역유지, 구국총력연맹원 등과 함께 나주 영산포에서 출발하여 세지면으로 향하였다. 이 부대의 토별작전 관련 기록은 1960년 5월 24일자, 『전남일보』의 기사 를 통해 알려 졌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4283년 12월 13일(양력 1951년 1월 20일) 낮, 영산포 쪽에서 국군 화랑부대 1개 중대가 입성하여 약 200명의 남 녀노소를 동창교 밑 만봉천 개천가에 모아놓고 군경가족을 제외한 뒤 청장 년 138명을 골라내 사살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20연 대 2대대 5중대 중대장 당번병이었던 김일호는 “1951년 1월 20일 나주 세지 면 동창교 일대에서 주민들을 집단 총살했다”고 진술하였다.158) 1951년 3월 19일에는 다도면 도동리 척동마을과 신기마을 주민들이 토벌 군에게 살해되었다. 도동리는 다도면의 남쪽 끝에 위치하여 영암군 · 장홍군 · 화순군과 경계를 이루고 국사봉과도 2km 정도여서 다도변에서 가장 늦게 수복된 지역이었다. 특히 1951년 군경에 의해 다도면 중북부 지역이 점령당하자, 동나주군 빨치 157) 진실화해위원회, 「나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J , 2009, 56쪽. 158) 진설화해위원회, 「나주동창교민간인집단희생사건J, 1f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J, 2007, 269-270쪽. - 8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