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page

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끌어냈다. 토별군은 먼저 군경가족을 골라내고 나머 지 주민들을 청장년 한 무리와 부녀자, 노약자 한 무리로 분류한 뒤 남자들 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도장리에서 민간인을 총살한 토벌군은 남쪽의 벽지리와 정천리를 거쳐 원 천리 동두산마을까지 이동하였다. 동두산마을 주민 노연태의 진술에 따르면, 토벌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 들을 마을 앞으로 끌어내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원천리 주민뿐만 아니라 도 장리와 정천리 주민들도 모두 모여 있었고, 국군을 따라 들어온 다른 마을 청년들도 있었다고 한다.153) 토벌군을 따라 온 청년들은 토벌군의 방조 하에 불려나온 주민들 중 청년 5명을 끌어내어 부역혐의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구타가 끝난 뒤 토벌군은 그 5명을 벽지리와 정천리 사이의 강산재로 끌고 가 1명은 총살하고 나머지 4 명은 풀어주었다.154) 한편 백아산지역 토벌작전은 1951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노동 당 전남도당 본부가 있었던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도 2월 20일경 군경에 의 하여 소각되었다. 주민들은 빨치산의 감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소각 되었어도 떠날 수 없었다.155) 3월 하순에는 백아산 북쪽인 북면 송단리에서도 대규모 토벌작전이 있었 다. 토벌군은 송단리를 포위하고 주민들에게 마을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주민은 짐을 꾸려 마을 밖으로 나왔지만 주민 조규선은 미처 나오 지 못하고 토벌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156) 153)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11사단 사건J, 2009, 114쪽. 154) 주민 노연태의 진술에 따르면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 전쟁 전 삼팔대라는 경찰기동대에 서 일한 사람이 끼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삼팔대 동기 중에서 군에 입대하여 토벌군 중위가 된 사람을 강산재에서 만나 그 중위에게 끌려온 청년들이 모두 무고한 사람이 라고 사정 얘기를 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교는 끌려간 사람들 중 한 명이 마을에서 너무 많이 맞아 풀어주더라도 혼자 움직일 수 없고 며칠 못 가서 죽 을 것이라며 총살하였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J , 2009, 114-115쪽.) 155)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J , 2009, 122쪽. 156) 희생자 조규선의 동생 조매실은 오빠가 쓰러진 모습을 본 다른 주민이 모친에게 조규 선의 사망사실을 전해주었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r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 순 · 영광) 11사단 사건J , 2009, 125쪽) - 8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