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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리가 아닌 이서면 서리에 가서 주민 12명을 사살하였다. 3대대 12중대는 12월 초 이서면 창랑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북면 와천리 의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였다. 와천리는 원래 옹성산이 가까이 있고, 또 백 아산과도 가까워 빨치산의 출몰이 잦았던 지역이었다. 12월 10일 창랑리의 12중대와 와천리 뒷산의 빨치산 사이에 교전이 벌어 졌다. 오후까지 계속된 교전으로 화력이 떨어진 빨치산이 퇴각하자 12중대는 와천리 사천 · 와천마을을 수색하여 청장년들을 끌어내어 마을 근처 ‘난드리 고개’에 있던 주막 앞에서 살해하였다.150) 또 12월 25일, 12중대는 북면 임곡리 임곡마을 근처에서 토별작전을 벌인 후, 임곡마을에 들어와 가옥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주둔지인 이서면 월산리로 대피시켰다. 군인들은 그 주민들 가운데 이호신 등 청장년을 빨치산으로 의 심하여 마을 앞에서 총살하였다.151) 한편 3대대 9중대는 1951년 2월 7일 남면 주산리 주산마을에서 작전을 수 행했다. 주산마을은 모후산에 있는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던 지역이었으나 사 건 당일에는 토벌군의 작전소식을 듣고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마을 뒷산 으로 올라선 9중대는 국군의 피해가 두려워 마을에서 피신하는 주민들을 향 해 총과 포를 쏘아 주민들이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152) 3월 중순 남면 유마리에서는 모후산의 빨치산을 토벌하던 국군에 의해 주 민 문성열 일가와 타지에서 유마리로 피난 와 있던 민간인들이 총살되는 일 이 있었다. 또 3월 17일 새벽 도암면 도장리에 진입한 토벌군은 가옥을 소각하며 주 150)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11사단 사건J, 2009, 116-118쪽. 151)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J , 2009, 120-121쪽. 152) 김종백 등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당일 69세의 김희상은 마을 앞에서 국군의 총탄 에 맞아 사망하였고, 국민학생 2명을 포함한 4명의 주민이 포탄에 맞아 사망하였으며, 거동이 불편했던 64세의 김충식은 9중대가 마을의 모든 가옥을 소각할 때 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불에 타 사망하였고, 김충식의 5세 손녀는 당일 밤 잘 곳이 없어 마을 인 근 개울가에서 밤을 보내다가 동사하였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 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J , 2009, 104-105쪽) - 8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