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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20연대 3대대의 첫 번째 사건은 11월 17일 발 생한 보복 살해사건이었다. 당시 화순읍에 주둔하였던 토벌군은 광주로 이동 중 화순과 광주의 경계인 너릿재에서 빨치산의 습격으로 대부분 전사하였는 데, 화순읍으로 생환한 토벌군은 화순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30여 명의 부 역혐의자를 다지리 인근 저수지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148) 3대대 9중대는 11월 21일의 연대 창설기념일 행사149)에 참석하기 위해 남 면 사평리에서 광주로 이동하던 중 11월 19일 오전 산길을 따라가는 20대 청년 4명을 발견하고 뒤를 쫓아 도암면 벽지리까지 갔다. 벽지리 봉동마을에 서 이 청년들이 5명의 20대 청년과 회합하자 9중대 군인들은 이 청년들을 빨치산으로 의심하여 봉동마을 앞에서 총살하였는데 이들 중 1명은 중학교 학생증을 가지고 있어 생존하였고 나머지 8명은 살해되었다. 지리에 익숙지 못한 토벌군에게 주민들이 피해를 업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1월 15일경 화순에 주둔하던 3대대 군인들은 차량 4대를 끌고 화순읍에 서 묘치재를 넘어 동복면으로 이동했는데 이 정보를 들은 빨치산은 묘치재 에 잠복하고 있다가 군인들을 습격하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하였다. 이 후 생존한 1명은 인근 동변 경치리로 피신하였다가 화순읍으로 복귀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3대대는 빨치산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묘치재 너머 첫 마을’을 찾아 11월 20일 주둔지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동복면에서 묘치재 너머 첫 마을은 경치리이고, 화순읍에서 묘치 재 너머 첫 마을은 이서면 서리인데 20일 보복을 위해 출동한 토벌군은 경 살하였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1 (59권), 1987, 432-435쪽;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1권), 1985, 691쪽;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1(1권), 1985, 712쪽) 148)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1, 2009, 129-130쪽. 149) “보병 제20연대 작명 제5호(1950년 11월 12일)에 의하여 출동된 제2, 3대대는 1950년 11월 21일까지 2개월간 연대작전 제 1단계를 완료하고 출동지로부터 원대복귀하다/’(보 병 제20연대, 「부대역사일지 J , 1970, 21쪽); “각 대대 개선(단기 4283년 11월 23일), 장 기 출동 중 다대한 전과를 획득한 연대 전 장병 차기 작전 대비 차 원대개선."(육군본 부, 『한국전쟁사료.1 (59권), 1987, 934-935쪽); “1950년 11월 연대 창설기념일 행사를 위 해 각 지역에 주둔했던 소총중대들을 광주로 복귀시킨 일이 있었는데, 그 공백을 메우 기 위해 연대의 직할중대가 각 소총중대의 주둔지에 파견된 일이 있었고, 우리 중포중 대 일부도 화순군 동복면으로 파견되어 1주일가량 주둔했다."(김권숙 통화보고서 2008.11.14) - 8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