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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군은 그들이 무동리 주민들임을 확인하고는 시선만 한 곳에 모아놓게 한 뒤 모두 지곡리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들은 인암리 방향으로 돌아갔다. 1951년 3월 18일 국군은 창평면(당시 남면) 외동리에 진입하였다. 외동리 는 국수봉(557.6m)과 월봉산(453.5m) 등 3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쳐진 요새여 서 빨치산이 근거지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때문에 사건 이전에도 군경이 자주 토벌작전을 벌였지만, 빨치산이 통행하는 주민들을 감시하여 주 민들은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인 3월 17일 외동리에는 빨치산이 와 있었는데, 18일 오전에 토벌군이 외동리에 온다는 정보를 알고 미리 마을을 빠져나가며 주 민들에게는 집에 있으면 군인들에게 살해되니 자신들을 따라 피난가자며 주 민들을 데리고 갔다. 이후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은 공포를 쏘며 가옥에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나오는 나머지 주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여 다수가 사살 당했다. 또 맹인 1명과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1명은 불이 붙은 집에서 나오 지 못하여 소사(燒死)하였다.136) 다.장성 광주에 주둔한 국군 제 11사단 20연대는 1950년 10월 19일 2대대를 장성읍 에 주둔토록 하였다.137) 이후 2대대는 북이면 사거리와 삼계면 사창리로 이 동하면서 각 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을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 빨치산도 장성군의 수련산과 장성과 영광에 걸쳐있는 태청산, 그리고 정읍과 경계인 입암산 등지로 퇴각하였다. 1950년 10월 31일, 2대대는 수련산 남쪽에 위치하고 동쪽으로 동화면에 접해있는 삼계면 수옥리 대화마을에서 작전을 벌였는데, 수옥리에서는 빨치 산이 토벌군의 작전소식을 듣고 주민들을 선동하여 청장년 남자들을 수련산 방향으로 끌고 갔다. 당시 대화마을에 있었던 주민 송옥순은 “오전에 빨치산 이 와서 집에 있으면 군인들이 죽일 것이라며 수각마을 뒤편의 수련산 방향 135) 진실화해위원회, r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J , 2009, 56쪽. 136)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11사단 사건J , 2009, 61쪽. 137) 육군본부, r한국전쟁사료.1(59권), 926. 937쪽; 보병 제20연대, 「부대역사일지J, 1970, 17쪽. - 8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