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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군은 당일 점심 무렵 운산리 산정마을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불러 모 았다. 군인들의 명령에 주민 중 김억만, 정연태, 정연호가 제일 먼저 마을 앞 에 도착하자 이들을 따로 분류하여 길 안내와 짐을 맡겼고, 나머지 주민들 중에 인민위원장을 먼저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인민위원장 은 이미 도망한 상태였다. 토벌군은 대신 인민위원장 가족 4명과 여맹위원장 을 불러내어 한 명씩 총살했다. 토벌군은 곧이어 산정마을 아래에 위치한 저심마을로 이동하여 마찬가지 로 인민위원장과 여맹위원장을 불러냈는데, 두 명이 앞으로 나오자 그 두 명 만 총살하였다.133) 인민군으로 위장한 토벌군은 월곡마을에서 주민들을 불러내어 ‘인민공화 국 만세’를 부프라고 강요하며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구타했다. 이에 정보순 을 비롯한 몇몇 주민들이 구타를 견디지 못해 군인들의 말을 따르자 현장에 서 총살하였다.134) 1951년 2월 11일 토별군은 또 담양군 남면 무동리와 인암리, 외몽리 산간 에서 눈에 띄는 민간인을 사살하였다. 당시 무동리 주민들은 1950년 12월경 국군의 가옥 소각으로 모두 담양군 남면 지곡리로 소개되어 있다가 당일 남면을 통과하여 무등산 아래 북산으 로 이동하던 경찰들을 따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무동리를 찾아갔다. 그러나 중간에 경찰들과는 길이 달라 주민들만 따로 무동리로 향했는데, 당시 인암 리 인근을 수색하던 국군이 인암리에서 무동리 방향으로 도망가던 빨치산을 쫓아 무동리를 수색하던 중 주민들을 발견하여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현장을 목격한 주민 김만식이 군인들에게 ‘왜 주민들에게 총을 쏘느냐’고 소리쳤고, 이에 군인들은 인암마을에서 무동리로 이동한 빨치산을 쫓아오다 가 사람들이 보여 사격했다고 대답하였다.135) 133) 산정마을 주민 정관기와 정명순은 당시 12중대를 따라갔다 돌아온 정연호를 통해 저심 마을에서는 두 명만 죽고 다른 피해가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 원회, r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 사건J, 2009, 51쪽) 134) 주민 정문기는 당시 몇몇 주민들은 끝까지 ‘인민군 만세’를 부르지 않아 살아날 수 있 었다고 진술하였고, 이에 대해 주민 박종섭은 당시 몇몇 군인들이 몰래 태극기를 보여 주며 자신들의 신분을 알려주어 끝까지 ‘인민군 만세’를 부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 사단 사건J , 2009, 52쪽) - 8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