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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마을, 산내리 송산 · 산안마을 등에는 원주민 이외에도 함평 · 장성 · 영광 군당 등 조선노동당 간부들과 당원 등 좌익들은 물론 다수의 민간인들이 군 경을 피해 들어와 움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온 민간인들 중에는 물론 빨치산과 같이 입산한 경우나 가족 중 타지에서 있었지만, 그 외의 민간인들은 대부분 1950 에 업산자가 있어 찾아온 경우도 11월 하순부터 다음해 1월 중순까지 5중대 불 이어지자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오히려 찾았거나,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작전에 위 퇴각하면서 인근 주민들을 강압으로 유인 년 10월, 수복작전이 시작된 이래 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갑산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협을 느낀 빨치산들이 불갑산으로 20연대 2대대와 연대 직할중대 126)는 19일 밤 11시부터 또 일부는 20일 새벽 2~5 따라온 사람들이었다.125) 2월 집결하여 오후부터 19일 하여 부득이하게 작전 하루 전인 불갑산 인근에 민간인들은 빨치산들이 방 군인들에게 집단으로 학살되 군인들이 산으로 피난 01 닙즈: 므끼--,::: 시 사이에 불갑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작전 후 불갑산 용천사 인근에서 붙잡힌 일부 어를 위해 오두재 인근에 파놓았던 방공호에서 기도 하였다. 사건현장에서 살아남은 문만섭은 당시 온 주민들을 방공호 쪽으로 몰아넣고 총살하였는데 자신도 오른팔과 오른쪽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고, 군인들이 방공호 속으로 들어와 군 그리고 귀위 횟발로 짓밟으면서 사망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고 진술하였다 127) 총살되지 않은 다수의 민간인들은 불갑지서로 불갑면 쌍운리 영광군 주민은 이상의 중 15세 현장에서 이들 군경은 2월 25일 한편 당일 연행하였는데 125) 1951년 1월 하순 장성군 삼서면에 은거하던 다수의 빨치산들은 20연대 2대대의 지속적 인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해 불갑산으로 퇴각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장성군 삼서면 학 성리 주민 문만섭은 1월 29일 빨치산들이 불갑산으로 이동하면서 자신들을 따르지 않 는 사람들을 반동으로 몰아 죽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갑산에 가게 되었다고 진술 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J, 11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3.J], 2009, 50쪽) 126) 11한국전쟁사료.J] 59권에는 당일 20연대 2대대 4개 중대와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중포중 대, 수색소대가 함께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59권), 1987, 1112쪽) 127)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주민 박기홍도 당시 국군과 빨치산의 교전이 끝나고 다른 피난 민들과 함께 오두치 인근 대밭에 숨어있었는데 군인들이 손을 들고 나오면 살려준다고 하여 다들 나갔다가 일부 주민들을 방공호에 밀어 넣고 총살시키는 것을 보았고 일부 민간인들은 지서로 연행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 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J , 11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3.J], 2009, 52-54쪽) - 8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