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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을 소각하며 주민들을 마을 논 앞으로 불러 모아놓고 기관총을 난사하 였다. 사건 후 5중대는 남은 주민들에게 성냥을 나눠주며 마을의 가옥에 불 을 지르게 한 뒤 주민들을 해보면 문장으로 소개 나가도록 했다.1 19) 다음날인 12월 7일 5중대는 월야면 월야리 순촌 · 송계 · 괴정 · 동산마을과 월악리 지변 · 내동 · 성주마을을 돌면서 가옥을 소각하고 주민을 월야면 월 야리와 월악리 사이의 ‘남산봐’로 몰고 가 사살하였다. 5중대가 이들 마을에 진입한 것은, 전날 밤 빨치산이 내동 · 지변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내동마을 뒷산에 봉횟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면서 5중대를 자극하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120) 군인들은 ‘남산꾀’로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군경가족은 분류하고, 주민들 을 17세 미만과 17-45세, 그리고 46세 이상으로 구분하여 17세 미만은 마을 에 돌아가 불을 끄게 하고 46세 이상 주민들에게는 해보 쪽으로 소개를 나 가게 한 뒤, 17-45세의 주민들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사살하였다. 이날 5중대는 세 차례에 걸쳐 확인사살을 하였는데, 1차 사격 이후 중대 장은 ‘살아있는 사람은 살려줄 테니 일어나라’고 하여 일어난 사람을 향해 재차 사격명령을 내렸고 다시 한 번 살아있는 사람은 살려준다고 하여 주민 몇 명이 일어나자 중대장은 이들을 마을에 내려가 불을 끄라고 하고는 바로 뒤에서 또 다시 사격명령을 내렸다. 그 뒤 군인들은 시신 사이를 돌면서 확 인사살까지 하였다.121) 남산봐사건 이틀 후 5중대는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에서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의 청년 20여 명을 끌고 가 사살하였다. 외치마을 앞에는 광주-영광 간 22번 국도가 있는데 사건 이전에 이 도로가 빨치산들에 의해 자주 끊겼 다. 도로가 끊기변 주민들도 군경에 동원되어 보수를 하곤 하였다. 사건 당 일도 군인들이 주민들을 불러낼 때 별다른 의심 없이 나갔었는데, 이날은 청 년 19명만을 선별하여 중대본부가 있는 해보면 문장 방향으로 끌고 갔다. 이 119)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J , 1'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l, 2007, 490쪽. 120) 신청인 정남진은 12월 6일 밤 빨치산 10여 명이 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이 산에 올라 봉횟불을 피웠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 사단 사건J , Ú"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l, 2007, 494쪽) 121)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J , 1'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l, 2007, 493-494쪽. - 8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