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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학교로 숙영지를 옮겨 인근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10월 28일에는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의 청장년 7명을 빨치산에 대한 부역 혐의로 인근 천주봉까지 연행하여 총살하였다. 희생자 곽원길의 딸인 곽연자 는 토벌군들 속에 마을의 속내를 잘 알고 있는 ‘벼락대’가 있었고 그들이 희 생자들을 불러냈다고 진술하였다.115)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0월 30일 2대대와 함께 영광 수복 후 화순으로 이동하였고, 함평에는 11월 하순부터 1951년 1월까지 2대대 5중대가 해보면 문장에 주둔하면서 불갑산 인근지역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5중대에 의한 함평지역 최초의 민간인 희생사건 은 11월 27일에 발생하였다. 당시 5중대는 윌야면 외치리 외치재에 초소를 설치하였는데, 외치리 동쪽의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현 광주시 광산구 덕림 동) 주민 오봉근 등 7명이 사전신고 없이 덕림리 주막에 모였다는 이유로 7 명 모두가 토벌군에게 외치재 초소로 연행되어 사살되었다.1 16) 5중대에 의한 두 번째 민간인 희생사건은 12월 6일 월야면 정산리에서 발 생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4일 전, 정산리 장교 · 동촌마을 앞 ‘한새들’ 들판에서는 5중대와 빨치산 사이의 충돌이 있어 5중대원 2명이 전사하였고, 3일 후인 5일 밤 일부 좌익들이 주민들을 마을 뒷산으로 불러올려 징과 팽 과리를 치며 잔치를 벌인 일이 있었다. 이에 자극 받은 5중대는 전사한 2명 의 복수117)를 위해 12월 6일 새벽 장교마을에 진입하여 가옥을 소각하면서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불러내어 무차별적으로 사살하였다.1 18) 장교마을 사건이 일어난 같은 시간 인근 동촌마을로 투입된 5중대원들도 115)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수복작전 민간인 희생사건J,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2j], 2008, 120쪽. 116) 참고인 유형렬은 계엄령이 내려진 당시 3명 이상이 모이려면 어떠한 경우라도 사전에 군경에 신고를 해야 했다고 진술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J ,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 2007, 487-489쪽) 117) 5중대 소속 사병이었던 양영언은 당시 5중대장이 전사한 2명을 화장하고 사병들 앞에 서 복수를 다짐했다고 증언하였다.(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j], 사회문화원, 2001, 272쪽) 118)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J ,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 2007, 489쪽. - 8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