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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대는 1950년 10월 19일 장성에 진주하여,96) 당일 ‘구(舊)장성(현 성산리 일대)’까지 진출한 후 인근지역 수복 및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는데, 2대대가 장성읍에 진주하자 빨치산은 수련산과 태청산으로 이동하였다.97) 2대대는 대대본부를 장성읍에 두고 7중대를 10월 말 북이면 사거리에 주 둔시켜 장성 북부지역 및 정읍 입암산지역 빨치산 토별작전을 담당하게 하 였으며,98) 5중대는 함평군 해보면, 6중대는 영광군, 8중대는 삼계면으로 이동 시켰다. 그 후 6중대는 고창읍에 주둔하였고,99) 5중대는 1951년 1월까지 함 평군 해보면에 주둔하면서 1월 20일 나주 세지면 동창교지역에서 작전을 펴 기도 하였다.100) 1951년 1월 중순 2대대는 수련산지역 토벌작전101)을 벌인 후 순창 회문산 으로 이동하여 1대대와 합동으로 회문산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다.102) 이후 2대대는 함평과 영광의 경계인 불갑산으로 이동하여, 2월 20일 연대 직할중대의 지원으로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 소탕전’103)을 전개하였다. 불갑산작전 이후 8중대는 다시 고창지역에 주둔하였으며,104) 6중대는 3월 3일에 ‘장성군 삼계면 태청산 소탕전’105)을 폈다. 3월 21일에는 6중대와 8중 96)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l(59권), 1987, 926쪽, 보병 제20연대, 「부대 역사일지 J 17쪽; 강 점 례 진술조서 2008.7.10 97) 보병 제 11사단, 『화랑약사.l, 1975, 84쪽; 기형호 진술조서 2008.7.8; 반주환 진술녹취록 2008.9.23 98) 7중대 사병이었던 김성순은 장성군에 진주한 후 북이면 사거리와 약수리에 주둔했다고 진술하였고(김성순 진술녹취록 2007.12.13), 북일변 박산리 주민 변석연은 현재는 댐이 들어서서 없어졌는데, 1950년 10월경에 장성읍에서 북이면으로 이어진 도로를 통해 군 인들이 사거리로 진주했다는 말을 들었고, 그 군인들이 11월 초에는 박산리 마을 앞 철 로를 따라 오고가는 모습도 보았다고 진술하였다.(변석연 진술녹취록 2008.9.25) 99) 1"한국전쟁사료.l 59권에는 원래 고창에 있던 국군 제 11사단 13연대가 1950년 12월 10일 20연대와 주둔지를 교체한다고 기록하고 있고(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l(59권), 1987, 608쪽), 6중대 사병 양창규는 “장성에서 영광으로 가 주둔하다가 고창으로 갔다”고 진술 하여(양창규 진술녹취록 2007.12.12), 6중대는 장성에서 영광으로 이동하여 주둔하다가 고창으로 주둔지를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6중대가 고창에 진주한 날짜에 대 해, 당시 고창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다 6중대장의 연락병으로 발탁되었던 이기화는 정 확히 1951년 11월 19일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 전에는 한차례 국군이 고창을 통과해서 지나간 일밖에 없었다고 하였다.(이기화 진술조서 2009.6.2) 100) 1월 20일 세지변에서는 5중대에 의한 ‘나주동창교민간인집단희생사건’이 발생하였다. 101) 수련산 자락에 위치한 통안리 주민 김요상은 1월 상순에 군인들이 마을을 소각했다고 진술하였고(김요상 진술조서 2008.3.7), Ir한국전쟁사료.l 59권에는 1951년 1월 24일 2대대 5 .6.8중대가 삼계면과 황룡면 일대의 수련산에서 집중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는 기록 이 있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l (59권), 1987, 949쪽, ‘장성군 동화면 일대 소탕전’) 102)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1 (59권), 1987, 1021-1027쪽. 103)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JJ (59권), 1987, 1106쪽. 104) 이기화(6중대장 연락병) 진술조서 2009.6.2; 홍순우(8중대원) 진술조서 2007.3.16 - 8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