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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02시 제 1대대는 순창지구에 집결 준동중인 잔비 토벌전을 전 개하여 제 1중대를 196고지로 제2중대는 391고지로 제3'4중대는 순창 전면 좌우 일대에서 각각 포위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순창 주위 산악지 대에 잠복한 잔비들은 일시 아군에게 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아군의 포 위공격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섬멸되고 일부 잔여병력은 아군의 포위망 을 탈출하여 순창 북방 산악지대로 도주함으로써 동일 13시 아군은 완전 히 순창을 확보하였다. "91) 그러나 10월 19일자 「미8군 정기작전보고」의 보고에 따르면, 1대대가 순 창에 처음 진주한 날은 10월 19일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2) 11월 6일의 작전 이외에도 『한국전쟁사료J 59권에는 1대대가 순창지역에 서 벌인 작전기록과 2대대가 1951년 2월 9일부터 16일까지 벌인 회문산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이 기록되어 있다,93) 한편 회문산지역 빨치산 토벌작전 이전 에 2대대의 장성지역 토벌작전이 마무리되면서 1951년 1월말부터 장성 수련 산과 태청산 인근의 빨치산이 퇴각하였는데 작전지역 인근의 주민이 빨치산 을 따라가기도 하였다.94) 1대대의 순창 회문산 지역 토벌작전 관련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91) 보병 제 11사단, 『화랑약사.1, 1975, 84-85쪽;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1(59권), 1987, 927 ' 940쪽, “연대작명 제6호(단기4283년 10월 13일부)에 의거 출동 중인 제 1대대장 육군소령 이동근 예하 1개 대대의 순창지구 섬멸작전" 92) 미8군 작전국, 「미8군 정기작전보고J , 296호(1950.10.19), “11ROK Div; 김충만 진술녹취 록 2008.11.20 93) 2대대의 회문산 지역 작전과 관련하여 『한국전쟁사료.1 59권에는, 1951년 2월 9일부터 16일까지 1대대와 함께 한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 및 장군봉 소탕전’ 이외에도, 2월 9일 의 ‘순창군 복흥면 석복리 소탕전’(같은 책, 1072-1076쪽), 2월 14일의 ‘쌍치면 774.2고지 동북방 고지 소탕전’(같은 책, 1072-1076쪽), 2월 15일의 ‘정읍군 산내면과 순창군 쌍치 면의 3개고지 소탕전’(같은 책, 1092-1096쪽), 2월 16일의 ‘순창군 쌍치면 644고지 소탕 전’(같은 책, 1097-1099쪽) 등이 기록되어 있다. 94) 1951년 1월 24일 2대대 5 ' 6 ' 8중대는 삼계면과 황룡면 일대의 수련산에서 집중적인 토 벌작전(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1(59권), 1987, 949쪽, ‘장성군 동화면 일대 소탕전’)을 벌 이는데, 황룡면 주민 이상용은 “당시 교전이 있고, 그 다음날 (군인들이) 보복을 하러 왔 는데, 무장 공비들은 순창 쌍치로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고 진술하였다.(이상용 진술녹 취록 2008.9.23) 그리고 ‘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희생사건’의 신청인 김영석은 또 “서삼면 장산리 임곡마을의 청장년 대부분은 군경이 오면 모두 죽는다는 빨치산의 선동 에 의해 1951년 1월 24일, 25일경 순창군 쌍치면으로 피신하였다”고 진술하였다.(김영석 진술조서 2008.7.9) - 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