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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서 격퇴하였다."8이 담양에 진주한 1대대는 대대본부와 3 . 4중대가 담양읍에 주둔하고 1 .2중 대는 전북 순창으로 이동하였다.87) 당시 담양군 용면 추월산과 가마골에는 빨치산 노령지구가 있었는데, 노령지구 빨치산 토벌을 위해 1대대는 먼저 담 양읍과 인근 지역 수복작전을 수행하고,88) 11월 초순부터 가마골 인근지역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89) 한편 순창지역은 회문산을 중심으로 쌍치면과 복흥면에 빨치산이 근거지 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회문산은 천혜의 요새이자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9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1대대의 순창지역 수복 일자는 1950년 11월 6일이다. 86) 보병 제 11사단, 『화랑약사.iI, 1975, 84쪽;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iI(59권), 1987, 926 . 936 쪽, “연대작명 제6호(단714283년 10월 13일부)에 의거 제 1대대장 육군소령 최형록 예하 1 개 대대는 남원-광주 간 도로를 차단하여 보급로를 위협하는 담양지구의 적을 섬멸작전” 87) “담양에 가서 주둔을 한 건 아니고, 하룻밤 산간의 민간 주택이나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고는 금과를 경유하여 순창으로 가서 순창 농림중학교에 주둔하였다. "(김충만 진술녹 취록 2008.11.20); “3중대는 담양읍의 한 학교에서 주둔하였다."(김태화 통화보고서 2008.11.14); “3중대가 광주나 순창에서는 아주 잠깐 있었고, 담양의 학교에서 5개월가량 주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정원휴 통화보고서 2008.11.14); “4중대와 대대본부는 담양읍 의 한 학교에서 같이 주둔하였다. 당시 2중대는 순창에 있었다/’(조병형 통화보고서 2008.11.14) 한편 1대대의 순창 진주시기에 대하여, 『한국전쟁사료.iI 59권에는 “연대 작명 제6호(1950.10.20)에 의거, 1950년 11월 6일 담양군에 주둔하던 제 11사단 20연대 l대대의 순창지구 섬멸 작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1중대 사병 김충만은 “담양에 가서 주둔을 한 건 아니고, 하룻밤 산간의 민간 주택이나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고는 금과를 경유하여 순창으로 가서 순창 농림중학교에 주둔하였다”고 진술하였다. 88) 이 기간 동안 1대대가 담양에서 수행했던 작전 중 『한국전쟁사료.iI 59권에 기록된 것으 로는 ‘연대작명 제6호(단기4283년 10월 13일부)에 의거 출동 중이던 제 1대대 담양 금성 면 작전’뿐으로, 작전은 10월 31일에 수행되었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iI (59권), 1987, 927. 939)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0월 30일 담양 무정면 덕곡리에서 도 1대대의 작전이 한 차례 있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광) 11사단사건 진실규명결정서.iI, 2009, 35-38쪽) 그리고 11월 7일, 20연대장 박기병은 담양 지역 수복을 기념하기 위해 담양읍 추성경기장에서 인근 주민들과 1대대 병력을 대상으 로 연설을 하고, 기간에 각 지역에서 부역혐의자로 잡혀와 담양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추성경기장 건너편에서 공개처형한다. 연설일자에 대해 『담양군지』에는 음력 9월 27일(양력 11월 6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담양군지편찬위원 회, 『담양군지.iI, 1980, 279쪽), 당시에 현장에서 처형된 피해자 함장수의 아들 함종호는 ‘부친의 사망일이 11월 7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신청인 함종호 진술조서, 2008.4.1) 89)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가마골 인근 지역인 용면 용연리에서는 1950년 11월 6일과 11일 1대대의 작전이 별어졌고(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 · 장성 · 화순 · 영 광) 11사단사건 진실규명결정서.iI, 2009, 42-44쪽), 11한국전쟁사료.iI 59권에는 ‘담양군 용 면 복룡리 299.3고지 소탕전’이 1951년 1월 25일 1중대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기록이 있 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iI(59권), 1987, 1083-1987쪽) 90) 순창군, 『순창군정사지(淳昌那政史誌).iI, 1998, 58쪽. - 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