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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초 ‘거창 · 산청 · 함양’에서 벌어진 ‘거창양민학살사건’은 거창 에 주둔하던 3대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사료.IJ 59권에는 2월 6 일과 7일, l' 2 . 3대대가 산청과 함양에서 작전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으 나,80) 3대대가 9일에서 11일까지 거창지역에서 실시한 작전내용은 누락되어 있다. 2대대는 1951년 3월 중부전선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화순과 장흥지역에서 도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는데 당시 2대대는 20연대 1 . 3대대와 함께 화순 화 학산,81) 나주 다도면, 그리고 장흥 유치면 등 유치지구빨치산 토벌작전에 주 력하여 빨치산 남해여단장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82) 2) 제13연대83) 1950년 9월 26일 경남 진해에서 11사단에 예속된 13연대는 제주도 제5훈 련소와 부산 제2훈련소로부터 사병을 보충 받아 10월 6일 부대 편성을 완료 하였다. 11사단에 예속된 13연대는 1 . 2대대가 10월 7일에 진주를 거쳐 함양으로 이동하였고,84) 3대대와 연대 본부중대는 8일 진해를 출발하여 10일 함양에 도착, 12일 함양에서 최초로 교전하였다. 13연대는 함양 일대에서 초기 작전을 수행하다가 11월 중순 9연대가 경북 상주에서 지리산 일대로 이몽하자 9연대에게 함양 일대를 인계하고, 전북으 로 이동하였다. 13연대는 10월 23일 전방지휘소를 전주로 옮기고, 11월 6일과 7일에는 후 80)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0 (59권), 1987, 365-366쪽. 한편 「미8군 정기작전보고」에 따르면, 9연대는 2월 5일 22시부터 7일 22시 사이에 모두 253명의 적을 사살하고 41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2월 12일에 보고하였고(미8군 작전국, 「미 8군 정기작전보고J , 645호, 1951년 2월 12일자), 7일 22시부터 11 일 22시까지 모두 143명 을 사살하고 4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보고하였다.(미8군 작전국, 「미8군 정기작전보고J , 666호, 1951년 2월 19일자) 그러나 이상의 수치는 당시 ‘거창 · 산청 · 함양’의 민간인 피 해규모에는 전혀 못 미치는 수치이다. 81) 참고로 유격지구가 형성된 봉우리의 높이를 살펴보면, 화순의 화학산은 613.8m, 화순 국 사봉은 499m, 나주 국사봉은 440m, 영암 국사봉은 613m, 장흥 삼계봉은 503m 등이다. 82)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0(59권), 1987, 432-434쪽. 83) 아래 내용은 『한국전쟁사료.0(59권)의 1987, 573-727쪽 기록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84) 13연대 1대대 4중대 사병 강혁두는 1대대가 함양에 주둔한 이후 거창읍에서 처음으로 교전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강혁두 진술녹취록 2009.7.31) - 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