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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는 ‘수어(水魚)이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견벽청야작전은 일본 군이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70) 제2차 세계대전 중 만주를 비롯한 중국과 베트남 · 버마전선에서 사용했던 초토화작전과 유사한 것이었다,71) 중국 국민 당 군대에 복무하면서 이 견벽청야작전을 인지하고 있던 최덕신은 빨치산과 일반 주민을 격리시키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을 소탕할 필요가 있 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작전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최덕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청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공비가 식량을 약탈하거나 인력과 건물을 이용할 수 있는 산간벽촌을 철수시컸습니다. 도처에 산재하는 벽촌을 사단병력을 소수부대로 쪼개서 일일이 보호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것이 ‘청야’에 해당하는 작전이 었습니다. 이 결과 공비들은 산 속에서 고립무원 상태에서 자진하는 형 세였어요."72) 최덕신은 빨치산이 산악지대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 아군은 지리적 • 수적 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견벽청야가 빨치산을 유인하 는 작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개념은 작전에 그대로 이용되어 자평하듯이 ‘다대한 성과’73)를 거두었 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병은 물론 중간 지휘관들에게 이러한 작전개념은 생 소한 것이었다. 따라서 최덕신은 사단참모회의 시 한지에 ‘建뿔淸野74)(건벽청 70) 일본은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부터 이미 의병의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 의병의 근 거지가 되는 산간 소부락을 불태워 평지의 일본군 지배하에 있는 부락으로 집단 이주시 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1930년대 만주의 집단부락 설치와 베트남전쟁에서 미 군이 취한 전략촌의 원형이 되는 전술이었다.(購原꿇 〈염수현 역〉, 『일본군사사.11, 시사 일본어사, 1994, 138쪽) 71) ‘초토작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전은 그 잔인성에서 악명이 높았는데, 일본군은 점령지 역 내의 적 유격대의 활동과 인적, 불적 지원의 큰원을 봉쇄하기 위해 점령지 주민들로 하여금 부락 단위로 유격대의 침입을 자체적으로 방어하거나 토벌군에 보고하도록 했 다. 만약 유격대가 부락에 침입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이들을 은닉, 또는 비밀리에 지원 하면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부락의 전 주민을 깡그리 죽이고 가옥과 가재도구를 소 각하여 전 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하는 작전을 폈다. 일본은 항일반만세력을 소탕하 면서 “백 명의 군중을 죽이면 그 가운데 공산당이 한 두 명은 있을 것”이라면서 대학살 을 자행하였다.(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2000, 297-298쪽) 72) 중앙일보사(편), D"민족의 증언.11 (중앙일보사, 1985), 191-192쪽. 73)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J! (59권), 1987, 923쪽. 74) 건벽청야작전은 堅뿔淸野작전의 오기로 중국 한나라 하숭천이 변방을 방어하기 위한 방 - 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