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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전쟁 중 “전공을 세우기를 은근히 가슴에 품고"54) 있어서 이승만 대통 령뿐 아니라 클라크 등 미군 수뇌부에도 잘 보이려 하였다. 당시 국군으로서는 후방 정리를 위해서는 토벌군 투입이 절실했던 상황이 었기 때문에 11사단 창설이 황급히 이루어졌으며 최덕신이 사단장으로 임명 되었다. 최덕신은 사단장으로 임명되자 창설요원 모집을 위해 연대장과 함께 부상병들을 직접 찾아 나서는 적극성을 보였다.55) “전쟁 중에 1사단 11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장을 하다가 우악산 전투 중, 허리에 파편을 맞아 후송되었다. 밀양 임시육군병원에 입원했는데 열 흘쯤 지나서 11사단장이 병원에 왔다. 사단장 최덕신은 ‘11사단에 갈 사 람은 손들어라’라고 해서 내가 손을 들었다. 그래서 바로 지프차를 타고 ‘사단창설요원’으로 갔다. 대구 달성공원에 가니 부대창설 중이었다."56) 11사단은 최덕신에게는 “갑자기 편성된"57)부대였으며, 따라서 지휘에 매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최덕신 자신은 11사단의 정신으로 ‘화랑도’를 내세웠 지만 이것을 장병들에게 관철시킬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대대 · 연대 차원에서 전 장병을 상대로 정신력 주입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각 연 대 · 대대별로 ‘분산작전’을 수행하다 보니 토벌작전에서 무리한 결과가 나왔 다고 증언했다.58) 로 그동안 창군에의 참여를 꺼리던 엄정계 인사들이 대거 업교한 기수로 대표적인 인물 로는 채원개, 박시창, 오동기, 최석용, 김상겸 등이 았다. 최덕신은 군번 10359로, 1947년 3월 22일 업대하여, 3월 23일 따로 훈련 및 교육을 받지 않고 중공군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바로 임관되었고, 1947년 7월 22일 중령 진급, 1948 년 12월 16일 대령진급 등 초고속으로 진급한 케이스였다. 1949년 7월, 제2차 도미유학생에 선발(최덕신, 최홍희 대령, 심흥선 중령, 장은산 소령, 강관용 대위, 이승호 중위 등 6명)되어 미 보병학교, 포병학교에 파견되어 107R월간의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9년 미국 Fort Riley 육군종합학교 초등군사반을 졸업하였다. 1950년 Fort Benning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졸업하였으며, 미국 유학 중 한국전쟁을 맞 았다. 1950년 7월 14일 미 군용기를 이용 귀국하였다.(최덕신, 『남한 땅에 30년.1, 통일평 론사, 1985, 48쪽) 부친 최동오는 한국전쟁 시 납북되었으며, 최덕신은 종전 후 군, 정계 요직을 거치다가 1977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197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6년 북한에 귀화, 역시 북한의 요직을 거쳐 1989년 11월 평양에서 사망했다.(한국정신문화연 구원 편, 『한국인물대사전.1, 중앙일보사, 1999, 2246쪽) 54) 최덕신, 앞의 책, 55쪽. 55) 참고인 임종식 전화면담보고(2008.8.20.) 56) 참고인 정석구 전화면담보고(2008.8.14.) 5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덕신 증언록(HA03025) J • 5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덕신 증언록(HA03025) J . - 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