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page

3. 11사단의 창설과 토별작전 가. 창설, 편제 및 지휘체계 1950년 8월 말 유엔군사령부는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1사단을 창설하였다}9) 예하에 9연대, 13연대, 20연대 등이 배속되 었다.11사단은 초기에는 육군본부 직할이었으나, 육본작명 제207호(1950. 10. 4)40)로 미9군단에 지휘권이 이양되었다.41) 미 9군단의 북상 이후인 11월 3일, 3군단42)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다시 육군본부에 소속43)되었다. 즉 11사단의 창설과 편제, 작전은 미 9군단 및 3군단의 지휘 하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11사단 예하 대대급 이상의 모든 작전은 미8군 정기작전보고에 기재되었다. 이와 같이 11사단의 상급 지휘부대가 끊임없이 바뀌는 이유는 전쟁 수행 중 계속된 군의 전력 약화와 이로 인한 빈번한 부대재편 등에 기인한 것으 로 보인다. 이승만은 “11사단이 무너지면 3천만 민족이 무너진다”라고 11사 단 순시에서 말했을 정도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11사단에 대해 깊은 신뢰 와 기대를 갖고 있었다.44) 39) 11사단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 부대는 “1950년 8월 27일에 국방부 일반명 령 제54호에 의 거, 경북 영천에서 육본직할부대로 창설되었으며, 육본 일반명령 제56호에 의거 육군 준 장 최덕신이 동년 9월 25일부로 초대 사단장에 부임하였다’'(11사단, 『화랑약사.n, 1975, 74쪽)고 쓰고 있으나 두 개의 명령은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40) 육군본부,『한국전쟁사료.n(63권), 1987, 99쪽. 41) 이러한 사실은 미9군단 작명 4호(미제9군단 작명 제4호, 1950.10.3. 0시)에도 나타나고 있 다. 날짜 상 오차가 있는 것은 미8군에서 작전계획을 수립, 이를 미9군단파 한국군 11사 단에 전달하는 단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8군에서 정한대로 1950년 10월 5일 또는 그 후에 상기 집결지구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 이 작명에는 11사단의 구체적인 연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한국군 제 11사단 : 사단사령부 및 1개 연대를 남원(1038-1382)지구에, 1개 연대를 광주 (990-1350)지구에, 또 1개연 대를 전주(1015-14)지구에 각각 집결시키라(육군본부, 『한국 전쟁사료.n)(63권), 1987. 42) r미8군정기작전보고(1950.1 1.3)J, 341 . 342호. 이어지는 343호에는 그동안 미25사단에 배 속(작전보고 259호/10.6)되었던 9연대가 배속이 해제되고 3군단에 배속되었다. 3군단의 11사단에 대한 지휘권 인수는 작전보고 348호(11.5.)에 의해 확인된다. 3군단의 창설은 육본작전명령 216호(1950.10.15)에 의해 이루어졌다.(1"공비토벌사.n, 부록 제3호) 43) “한국군 (1950년 12월) 141200부로 11사단은 한국군 3군단에서 해속, 육본직할로 됨. ,,(r미 8군 정기작전보고 4 J , 제467호) 44) 11사단 13연대 소속 강혁두의 진술. 강혁두 진술녹취 (2009.7.31.) - 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