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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에 따르면 “사람들이 많아 걸어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6) 특히 국군의 수복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이피해가 발생하자, 월야, 해 보, 나산면과 장성군 삼서면에서는 일반 주민들과 그 가족들까지 이곳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그 수는 급증했다. 학도병으로 특별중대 소속이었던 반삼모의 경우 불갑산 지구에 존재했던 ‘해방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거기 갔더니 계곡에 정미기가 있고 큰 가마솥이 요. 거기서 밥을 해 먹고요. 그때 여자들도 상당히 요. 어린애도 있었고. 멀리로 도망을 가는데 우리가 15개 정도 있더라고 많이 있는 걸로 봤어 총을 쏘면서 가니까 보이고 ... (도망가 그랬지요. "37) 막 산으로 도망을 가는데 여자들도 보이고 어린애들도 는 어린애들에게도 총을 쏘았는가?) 기관총으로도 쏘고 한편 빨치산 출신 인사는 자신들이 ‘해방구’라고 부르던 빨치산 유격지 구에 있는 주민들이 빨치산을 산손님 · 밤손님이라 부르며 적대적이지 호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38) 이러한 상황 때문에 토벌군은 유격지구 내에 거주했던 주민을 모두 。1--:-7 1동‘- 빨치 산 협력자, 호:'..Q.. - , '- 빨치산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 은 이러한 배경에서 실시되었다. 해 서 당시 토벌군은 빨치산들과 주민들을 단절하고 식량지원 등을 차단하기 위 빨치산 근거지 주변 마을들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이 과정에 빨치산 내통자로 의섬되는 청년들은 집단으로 사살되었으며, 식량은 소각 되거나 압수되었다. 36) 이근신 진술(2000.1 1.22),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lI, 사회문화원, 2001, 55쪽에 서 재인용. 37) 참고인 반삼모(20연대 2대대 특별중대) 진술녹취록(2008.9.9.) 38) 정 관호 면담보고(2009.6.10.) - 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