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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부를 순창군 회문산으로 이동시켜 인민유격대 전북사령부를 조직하였다.31)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던 유격기지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도 영남과 호남 지구, 제주지구 및 지리산, 태백산 지구 등 자생적인 지구의 형태로 일부 존 재했다. 전쟁 중에는 전남의 경우 백아산 전구, 불갑산 전구 등 총 8개 또는 11개의 유격기지가 확인된다.32) 소위 빨치산 ‘해방구’는 주로 산을 끼고 존재 하였는데, 이는 피신이 용이하고 진입봉쇄가 쉽다는 이점을 이용한 것이었 다.33) 이들 빨치산의 근거지는 주로 산악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유격지구는 결과적으로 군경 토벌작전의 주요 작전지역이 되어 이 지역으로 모여 들었던 인민군 점령기 부역자 가족들을 포함한 토벌을 두려워해 피해 온 일반 주민들이 이후 대량 살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전남 함평 불갑산 지구의 경우 1946년 10월 농민봉기부터 제 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빨치산들의 거점이 되었 다. 이 지역에 1950년 7월 23일 인민군의 진주가 있었고 이후 지방토착 좌익 들에 의해 함평군 인민위원회 내무서가 설치되는 등 북한 통치체제가 갖추 어졌다. 또한 함평군 내 각 면 인민위원회, 민청, 부녀동맹, 소년단, 조국보위 위원회 등이 조직되어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북한식 통치가 있었다.34) 군경이 함평읍에 진입한 것은 10월 22일로 인민군에게 점령된 지 3개월 만이었다.35) 지방 좌익들은 한국군의 진입이 임박하자 북한점령기 협력자는 물론, 우익 및 유지들까지 불갑산 입산을 강요하였다. 수복과정에서 빨치산 과 지방좌익의 불갑산 입산 당시 동행했거나, 피난차원에서 입산한 주민들의 규모는 최소 수천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30) 김영택, 「한국전쟁기(1950년 10월-1951년 3윌) 불갑산지구 빨치산과 ‘대보름 작전’」, 『북 악사론』 제 10집 , 2003, 413-414쪽. 31) 사령관은 방준표, 부사령관은 조병하였고, 직속부대로는 이택부대 (60명), 보위부대(150 명), 백학부대(70명), 돌진부대(60명), 광산부대(50명), 학소부대 (40명), 기포부대(120명)가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 밑에 제 1정치사령, 제2정치사령이 있었다. 제 1정치사령은 전주시 당 유격대(70명), 김제군당 유격대(50명), 임실군당 유격대 (310명), 순창군당 유격대 (260 명), 완주군당 유격대 (150명), 익산군당 유격대(100명), 금산군당 유격대 (300명), 진안군당 유격대(50명), 무주군당 유격대(130명), 장수군당 유격대(470명), 남원군당 유격대 (150명) 를 지휘했다. 제2정치사령은 정읍군당 유격대 (60명), 고창군당 유격대(590명), 부안군당 유격대(160명)를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남식, 앞 책, 459쪽. 32) 정관호 면담보고(2009.6.10.) 33) 정관호 면담보고(2009.6.10.) 34) 함평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사.!I TI, 1999, 67쪽. 35) 진실화해위원회, 함평수복작전민간인희생사건 진실규명결정 (2008.14.) - 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