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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4만의 괴뢰군은 전남, 전북, 경남의 3도에 걸친 지리산을 근거지로 호남 일대에 종전상태라기보다 지금부터 개전이 전개된 감이 유하다. · 경찰은 일군에 백 명 내지 이백 명으로는 마치 고양이 앞에 쥐가 놓여 있는 격임에도 불구하고 기 용전한 태도에는 안타까워 볼 수가 없 었다. 그야말로 매일과 같이 습격당하고 있을뿐더러 어느 때 기군의 경 찰이 전멸 당할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풍전등화격이 되어 있다 ....... 반 면 괴뢰군은 지리산 근거지에 군단본부, 군단지부, 유격대로 나누어 기중 에는 보병, 포병, 기병을 두고 정치공작선전으로는 도 군 면 당부를 두어 부락민에게 미구에 중공군과 소련이 참전하야 3차전이 개전되오니 추곡 을 수확하여 현물세를 납부하라고 야간선전을 감행하고 만약에 3개월 동 안에 인민군에 협력한 자로서 자수한 자가 있다면 기 가옥은 전멸시킨다 는 등등의 위협을 하고 기 부락의 대한민국 협조자라고 보이는 자를 타 살 혹은 가옥에 방화함으로 상대방의 협조를 금할 도리가 없고 붉은 지 폐를 주고 시장에서 물품을 갖고 간 곳도 있는 상태이오니 목불인견의 상태이다. 또한 매야 통신 교통망을 두절키 위하여 전주 전선절단 또는 철도 파괴 등등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상태이다."17) 즉 중공군이 남하하던 1950년 11월 당시 한국정부는 후방의 위협 때문에 ‘종전’이 아니라 ‘개전’이 전개된 것으로까지 볼 정도로 상황을 위급하게 인 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과 한국정부의 입장에서는 후방의 공비토 벌작전이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태백산맥, 소백산맥,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 으로 연결되는 이 지역의 빨치산을 단시일에 제압하지 못할 경우 단양인근 까지 내려온 중부전션이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한 내 빨치산 유격지구의 총 규모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으나 전남의 경우만 “5만여 명이었다" 18)는 증언이 있고, 정부 측19)은 총 4만 명이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 기록에 의하면 당 시 1950년 10월 중순 현재, 인민군 패잔병의 규모는 4,000-6,000명20) 또는 1 17) 국방부정훈국전사편찬회, 『한국전란 1년지.Jl, C25. 18) 정관호(전 전남노동신문 주필) 면담보고(2009.6.10.) 19) 국방부정훈국전사편찬회, 『한국전란 1년지.Jl, A42, 1951.; 내무부 장관의 ‘치안상태에 관 한 보고,’ 115회 국무회의록(1950.10.31.) 20) Ir한국전쟁사료.Jl(59권), 1987, 374 . 574쪽. 각각 11사단 9연대와 13연대의 문서에서 언급 - 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