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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빨치산 토별작전의 배경 1. 유엔군 서울 수복이후의 후방상황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9 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민군에 대한 반 격을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데 이어 10월 20 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 21일 압록강 국경인 혜산진까지 진출하는 등 북진 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중공군의 1차 기습공격 이후 후퇴를 거듭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상황을 맞았다. 1월 중순에는 전선이 37도선 (단양) 부근까지 내려왔고 1950년 11월 10일자로 해제됐던 비상계염이 12월 7일 다시 선포될 정도로 전황은 갑자기 불리해졌다. 중공군의 참전 후 계속된 남하로 사기가 충천한 빨치산의 공세 또한 활발 해졌다. 미 국방부 관리가 “남한의 미군 전선 후방에는 혹독한 유격대 전쟁 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군 3군단과 미군 9군단이 전선에서 직접 군사 작전을 실시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유격대와의 전투에만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고 있다"14)라고 발표할 정도로 유격대의 공세는 격렬하였다. 이와 같이 1950년 10, 11월 당시 남한의 치안상태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당시 내무부에 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전체 지서의 ‘2할 정도’15)만 복구된 상태였으며, 이는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치안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전 남의 경우, “257R 시 · 군에서 4개 시 · 군을 제외한 지역이 인민공화국 상 태"16)라고까지 진단할 정도로 전남 대부분의 시 · 군이 좌익의 영향권에 있 었다. 국회 시찰 결과에도 이러한 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 당시 인민군 패잔병 의 위력은 후방 군경의 물리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정부로서 는 위협세력 제거가 최우선 과제였다. 14) 국방부 군사펀찬연구소,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1, 2001, 263쪽. 15) 내무부 장관 보고, 109회 국무회의록(1950.10.23.) 16) u'한국전쟁사료.))(59권), 1987, 922쪽. - 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