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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병을 살해하였다. 창서마을에는 전날 경찰이 작전을 나왔다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경찰 6명과 의용경찰대원 2명이 전사하였다.4(0) 경찰은 다음날 이른 아침 이 마을에 다시 들어왔다. 다음은 윤진병의 손자 윤석곤I다 -5313(1)]과 정항수의 손자 정일성(다-6300)의 진술이다. “할아버지가 1950년 3월 12일(음력 1월 24일)401) 대창리 창서마을 뒷산 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습니다. 반란군이 자주 출몰하여 음식물 둥을 가 져갔는데, 경찰이 그 정보를 듣고 마을에 왔다가 오히려 반란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경찰이 누가 반란군을 도왔는가를 추궁하면서 아버 지의 행방을 물었으나 할아버지가 대답을 않자 총살하였습니다. 시신은 사건 후 가족이 수습하였습니다. 정일성의 할아버지도 함께 ←돌아가셨습니 다."402) “1948년 3월 4일(음력 1월 24일)403) 아침 경찰이 할아버지를 총살하였습 니다. 사건 전날 경찰 6, 7명이 술을 먹고 가다가 감나무에 새가 있어 총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마을 초입에서 망을 보던 빨치산이 총성에 놀라 경찰 에게 총을 쏘았고 경찰이 전사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용두리로 피난을 갔 는데 다음날 실 꾸러미를 가지러 마을에 가셨습니다. 그때 경찰이 할아버 지를 총살하였습니다."404)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마을에 거주하였던 참고인 윤금중은 사건 전후의 상 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전날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였고 이장이 경찰에게 점심을 대접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반란군이 마을 입구에 있다가 경찰 8명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다음날 마을에 다시 왔는데 젊은 사람은 모두 피난을 갔고 정항수와 윤진병만 마을에 었다가 경찰에게 연행되어 죽었습니다. 연도는 400) ‘'20일 석양에 함평 해보 지서원 6명과 의용단원 2명이 정보수집 차 창서부락에 출장 중 무장반 도 약 80명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하였는데 중과부적으로 불행하게도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급보에 접한 경찰당국에서는 방금 응원대를 현지에 급파하여 필멸의 태세로 포위 중이다" r海 保에 級徒 80명J, 1949.2.22, Ð"호남신문』 401) 신청인은 윤진병이 사망일자가 1950년 음력 1월 24일이라고 하였으나 빨치산의 경찰습격이 1949 년 2월 20일이라는 보도내용을 볼 때 사건 발생연도는 1949년으로 보인다. 402) 신청인 윤석곤 진술조서(2α>9.3.13.) 403) 신청인은 신청서상에는 1949년 1월 24일(음력)이라고 하였으나 진술조서 작성시 1948년으로 진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도내용을 볼 때 사건은 1949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404) 신청 인 정 일성 진술녹취(2008.6.27.) - 7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