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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빠의 시신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36외 사건 당시 대창리 창서마을에 거주하며 사건을 인지하였던 참고인 윤금중 은 이금범이 학도연맹원에게 연행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금범은 저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습니다. 그 사람은 학도병이었는 데 조직에서 찍혔는가 어쨌는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마을에서 사라졌습니 다. 시신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나이도 어린데다 중학교에 다니 면서 학도병을 하였으니 누구를 괴롭히고 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370) 광암리 운암마을 정영수(다-4420)의 숙부 정복현은 보도연맹원으로서 보도 연맹사건이 났을 때는 살아남았다. 정복현은 전쟁이 일어나고 그 후 수복 무 렵인 1950년 11월 초 경찰에 연행되었다. 다음은 신청인 정영수의 진술이다. “저는 옆집에 살았지만 몸이 아파서 목격은 못하고 나중에야 함평경찰서 기동대가 숙부를 연행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숙부 시신은 찾지 못하였는 데, 1960년도에야 사망신고를 하였습니다. 사건 무렵에는 빨치산이 밤에 와서 음식물을 가져간다고 경찰이 마을 수색을 자주 벌였습니다."371) 보도연맹원 정복현의 희생사실에 대하여 정복현이 경찰에 연행된 사실에 대하여 참고언 박용원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정복현은 한 마을에 살았는데 나이는 30대였습니다. 정복현은 수복 무 렵에 죽었습니다. 정복현은 보도연맹원으로서 1950년 7월 전쟁 직후 보도 연맹원을 죽일 때는 살아남았습니다. 수복 후 광암리 주민은 대각리 오두 치로 소개를 나갔는데 정복현은 소개를 나가기 직전 경찰의 출두 명령을 받고 나갔었습니 다."372) 1950년 6월 27일(음력 5월 12일) 이정숙(다-3921)의 조부 이계병 이 마을에 369) 신청인 이점봉 진술조서(2007.10.12.) 370) 참고인 윤금중 진술조서(2009.6.17.) 371) 신청 인 정 영수 진술조서(2008.3.15.) 372) 참고인 박용원 진술조서(2α)9.6.18.) - 7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