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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1리 원남마을 주민 조기천(다-2241)의 형 조기형은 1950년 12월 11일(음 력 11월 3일) 경찰의 명령으로 월암리 연천마을로 소개를 나가다가 면소재지 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조기형의 시신은 한 달 정도 지나 계천리 계월마을 에서 수습하였다. 또 같은 마을 김용찬(다-2242)의 부 김경수와 형 김용운도 12월 8일(음력 10월 29일) 경찰의 소개명령으로 백운리 종곡으로 이삿짐을 나 르다가 면소재지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려 아버지 김경수는 현장에서 살해되 었고, 형 김용운은 연행되었는데 한 달 뒤 시신을 수습하였다. 당시 마을의 상황에 대한 신청인 조기천과 김용찬의 진술이다. “불갑산 용천사까지 거리가 2뼈 정도인데 밤마다 빨치산 6, 7명이 ‘따풍 총?을 가지고 내려와 주민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주민들 이 빨치산의 위협으로 밥을 해주면,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한 마을 에 살았던 김용우, 임영춘, 이윤양, 이만옥, 이천옥 둥 눈에 보이는 젊은 사 람을 모두 연행하였습니다. "319) “사건 며칠 전 영광에서 함평으로 이동하던 경찰차량이 삼덕리 좌야 옆 산 봉우리(고깔봉)에서 빨치산의 습격으로 경찰 20여 명이 사망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영향으로 며칠 뒤 경찰이 우리 마을을 소개 시켰습니다. 그 무렵 원산리 학동마을 고모할머니 집에서 빨치산 대장이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보았습니다."320) 삼덕리 좌야마을 앞의 경찰과 빨치산의 교전에 관하여는 당시 구국연맹 신 광면 지부장이었던 모원도 비슷한 진술을 하였다. “신광면이 수복될 무렵 삼덕리 바로 앞에 ‘서근다리’가 있는데 그 부근 에서 빨치산과 경찰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그 교전에서 빨치산이 10명 정 도가 죽었습니 다. "321) 사건 당시 마을에 있으면서 이들 사건을 목격하였던 참고인 이기섭은 당시 마을의 상황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318) 참고인 김영이 통화보고(2009.8.31.) 319) 신청인 조기천 진술조서(2008.4.22.) 320) 신청인 김용찬 진술조서(2008.4.22.) 321) 착고이 모워 진술녹취Qα>9.3.6.) - 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