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8page

도 1950년 음력 10월 15일 군유산의 반란군에게 돌아가셨습니다."307) 1950년 12월 15일(음력 11월 7일) 계천리 계월마을 앞 까마귀머리산에서 경 찰에게 살해되었던 김일근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아들 김병섭(미신청)은 다음 과 같이 진술하였다. “음력 동짓달 초였는데 경찰이 피난을 나가라고 하여 면소재지인 월암리 로 피난을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눈이 와서 눈가래를 만들려고 나가셨다가 경찰에게 연행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방을 찾던 중 함정리 분들 과 연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동네 분들과 계월마을 까마귀머리산 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부근에 매장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연행된 사람은 강대원, 그리고 김맹근의 형님 등이었습니다."308) 라)원산리 원산리는 해보면과 신광면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빨치산사령부가 있었던 용천사와는 2뼈 남짓 떨어져 있어 빨치산 출몰이 잦았던 지역이다. 경찰은 원 산리에 진주하면서 주민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키고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 자를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경찰은 사건 이후 원산1리, 2리를 소개시켰는데 주민들이 피난을 나가다 경찰의 검문에 걸려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1950년 12월 3일(음력 10월 24일) 점심 무렵이 지나서 경찰이 대한청년단원 20여 명과 함께 원산리 원남마을에 진주하였다. 경찰은 면소재지에서 학동, 덕동을 돌아 다시 학동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 집결시켰다.309) 경 찰은 가지고 온 명단을 보고 주민들 속에서 젊은 사람을 불러내기 시작하였 다. 다음은 신청인 이춘만(다-1532)의 진술이다. “경찰이 학동과 덕동 주민 100여 명을 집결시키고 책임자인 박용주를 찾 았는데 박용주는 이미 숨어버린 뒤라서 학동마을 서기였던 저의 형 이대근 이 나갔습니다. 경찰은 집결한 주민 중 덕동마을 전무남,3l이 김기병,311) 천 307) 참고인 김병일 진술조서(2009.4.21.) 308) 참고인 김병섭 진술조서(2009.6.14.) 309) 신청 인 이춘만 진술조서(2008.5.7.) 310) 신척인 서역순(다.-1531)의 시당숙 - 7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