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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윤한원은 산사람들이 시켜서 마을 앞 산봉우리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고, 남동생은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만삭이라 집안에 계셨는데 경찰이 마당까지 들어오} 쏟 총에 사망하였습니다. 네 살짜리 여 동생은 집안에 두고 갔었는데 이불속에 숨겨 놓아 목숨을 건졌습니다."276) 이 사건에 대하여 참고인 이재현은 “윤수봉은 죽암리 석령에서 태어나 어려 서는 손불면 윌천리 저수마을에서 살았다. 윤수봉의 가족은 사건 무렵 어머니 가 임신 중인 상태에서 신광면 송사리 2구 해안마을로 이사를 갔었는데 그곳 에서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윤한원으로부터 시신은 해안마을 앞에 매장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 하였다.277) 1950년 12월 이전에는 백운리 신기마을에 살았으나 사건 무렵 송사리 해안 마을에 거주하였던 김중신(다-7287)의 조부 김판동은 1950년 12월 12일 작전 을 나왔던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김판동의 며느리 이춘재는 시아버지 김 판동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시아버지는 시고모가 해안마을에 살고 있어 그곳에 가셨는데 음력 동짓 달 초4일에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잡아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 다. 시아버지의 시신은 고모부가 수습하였고 현재는 삼천동에 살고 있는 분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의 제사는 제가 시집을 와서 보니 동짓 달 초3일에 모시고 계셨습니다. "278) 다음은 삼천동에 거주하면서 김판동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참고인 주육 손의 진술이다. “제가 김판동의 아들 김홍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김판동은 백운리 신 기마을에 살다가 사건 무렵 해안마을에 있었는데 1950년 12월 12일(음력 11월 4일)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습니다. 시신은 작전이 끝나고 경찰이 나 간 다음에 옷을 보고 확인하였다고 들었습니다."279) 276) 신청인 윤수봉 진술조서(2008.5.6.) 277) 참고인 이재현 진술조서(2009.5.28.) 278) 참고인 이춘재(김중신의 어머니) 통화보고서Qα)9.8.21.) ;'79) 착고언 주육손 진술조서(2009.3.31.) - 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