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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안마을 상황에 대하여 안의순은 “1950년 12월 12일 아침밥을 먹은 후였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마을을 사이에 두고 앞산에는 경찰이, 뒷산에는 반란군이 있었는데 양측의 교전이 벌어졌다. 그 뒤 젊은 사람들은 피난을 갔고 노인과 아이들만 남아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다음은 사망경위에 대한 안의순의 진술이다. “저는 피난을 갔다가 어스름할 무렵에 내려왔습니다. 그날 교전 후 경찰이 마을을 돌면서 불을 지르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약자들을 총으로 씩 죽였 습니다. 노정순의 시어머니 김감산의 시신은 군유산으로 피난 갔던 아들 2명 과 큰 며느리가 마을로 내려와 수습하였습니다.’'27깅 해안마을 안의순(다-2742)은 자신은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여동생 안순 자(1942년 출생)와 안판례(1945년 출생)는 마을에 남아 있다가 경찰에 살해되 었다. 신청인 안의순의 진술이다. “군유산 반란군의 명령으로 보초를 서면서 경찰의 진주를 목격하였는데 경찰이 오전 10시경 마을에 왔고, 반란군도 비슷한 시간 송사리까지 왔었 습니다. 그날 경찰은 노증산 방향으로 왔고, 반란군은 송사리 뒷산에서 왔 습니다. 저는 여동생 순자, 판례는 집에 남겨둔 채 조모님을 모시고 부모님 과 같이 군유산으로 갔습니다."273) 안순자와 안판례의 사망에 대하여 같은 마을 참고인 임종연은 “해안마을 뒷 산 봉우리에서 반란군과 경찰의 교전이 있었는데, 교전 후 경찰은 해안마을 에서 자기들에게 총을 쏘았다고 오해하고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질렀다”고 진 술하였다.274) 안의순이 군유산에서 내려왔을 때 안순자와 안판례의 시신은 이 미 불에 탄 상태였는데 안의순 형제가 수습하였다.275) 해안마을 윤수봉(다-3640)의 어머니 김금순도 1950년 12월 12일에 마을에서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윤수봉의 부모는 손불면 월천리가 고향이지만 일 때문에 해안마을에 계셨고 윤수봉은 윌천리에 있었다. 윤수봉의 진술이다. 272) 참고인 안의순 진술조서(2009.3.5.) 273) 신청 인 안의순 진술조서(2008.4.23.) 274) 참고인 안영환 · 임종연 진술조서(2009.3.5.) 275) 신청 인 안의순 진술조서(2008.4.23.) - 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