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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어머니를 따라 군유산 칩재에 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서 아버지 시 신을 수습하여 현장에 매장하고 유품을 가지고 밤늦게 내려왔습니다. 아버 지 시신이 었던 부근에 박영태의 할아버지 박두식과 박상규의 할아버지 박 내언의 시신도 함께 있었습니다."257) 1950년 12월 12일(음력 11월 4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차경마을에서 경찰의 진주과정을 목격하였던 주민 안영환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제가 그날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내려오면서 보니 박영규의 부인이 울고 있어 그 곳에 가보니 박영규가 총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그분은 그 날 아침 일찍 저에게 이발을 하고 나갔는데 삼천동으로 넘어가는 고랑에서 북성리 방향으로 진입하는 경찰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박영태와 박상규의 할아버지도 같은 장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 분이 함께 있었는데 이 분 들이 피신하였던 곳은 경찰이 진입하면서 보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습니 다. "258) 박영태(미신청)는 할아버지 박두식의 사망에 대하여 “할아버지는 군유산 기 숨 칩재에서 돌아가셨다.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면 주민들을 귀찮게 하였는데 그날도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는 박내언, 박영규 등과 군 유산 방향으로 피난을 가셨다”며 “할아버지 시신을 수습할 때 보니 옆구리에 총을 맞은 상처를 보았다”고 진술하였다.259) 박상규(미신청)도 할아버지 박내언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할아버지는 소를 귀한 재산으로 생각하셨는데 그날도 소 때문에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가 까운 칩재로 가셨다”며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니 수소문하여 칩재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동네 어른 두 분이 함께 계셨다”고 진술하였다.260) 박영규, 박두식, 박내언은 신광 경찰고지에서 출발한 경찰이 진입하면서 총 격을 가하자 군유산 첩재로 피난을 하였는데 셋이 함께 있다가 경찰의 총격 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57) 참고인 박광수 진술조서(2008.8.8.) 258) 참고인 안영환 진술조서(2009.5.26.) 259) 참고인 박영태 진술조서(2009.6.13.) 260) 참고인 박상규 진술조서(2009.6.13.) - 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