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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까지도 좌우 양쪽에서 피해를 보자 불갑산으로 가셨습니다. 경찰 00 。 이 나중에 ‘인공 때 좌익이 부인을 경찰가족이라고 죽였다. 수복 후 월야지 서에 와 이 말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였습니다. "234) “아버지는 해방 후 월야면장을 하셨는데 피난을 가지 못하여 어쩔 수 없 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수복 후 아버지는 자수하려고 월야리 백 야마을에 숨어 계셨습니다.000의 처가 쪽이 인민군 점령기에 경찰가족 이라 죽었는데 막아주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경찰과 의경이 동 네를 포위하고 네 분을 연행 • 총살하였습니다. 경찰이 아버지를 끌고 나오 는 것을 집에서 보았습니다. 시신은 사촌형님이 수습하셨습니다."235) “아버지는 외가가 광주여서 그곳으로 피난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 지가 고향에 계시니까 고향에 다니러 오셨다가 경찰에게 죽임을 당하였습 니다. 우리 집안이 정태진과 한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시신은 정태진의 집에서 연락이 와 집안에서 수습하여 월악리 선산에 매장하였습니다."236) 사건 당시 외치리 백야마을에 살고 있던 정길진은 정재두 등이 월야지서 방 향으로 연행되는 것을 보았고 얼마 뒤 외치리 백야마을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들었다고 하였다. 사건 발생이유에 대하여 정길진은 월야지서 000 순경이 자신의 처가가 인민군 점령기 인민군에게 살해될 때 막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었다고 진술하였다. 다음은 참고인 정길진의 진술이다. “저는 백야 작은 마을에 살았고 정재두는 백야 큰 마을에 살았습니다. 돌아가신 정재두는 집안 형님인데 월야지서 경찰 000 에게 연행되어 월 야지서로 가다가 외치리 산언덕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함께 돌아가신 분은 정판근, 장동섭 등으로 네 분은 연배가 비슷합니다. 인민군 점령기 000 의 처가가 피해를 보았는데 그 보복으로 죽였습니다. 현재 월야중학교 뒤 에 지서가 있었는데 000의 처가가 지서부근에 있었습니다."237) 정재두 등 4명의 주민이 월야지서 경찰 000에게 살해된 사건에 대하여 당 234) 신청인 정태진 진술조서(2008.6.12.) 235) 신청 인 장철금 진술조서(2008.8.6.) 236) 신청인 정광섭 진술조서(2008.3.22.) 237) 참고인 정길진 진술조서(2009.6.16.) - 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