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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하였다.216) 또 박용화의 친척으로 송사리 사간동에 살았던 정내숙은 “송임 댁과 박균신 형제는 군유산작전 때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는데 시신은 곽일 례의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수습하였다”고 진술하였다.217) 신청인 김이순(다-3649)의 아버지 김희권도 함정리 청계에 살았지만 손불면 북성리 사기마을 뒤에서 경찰에 살해되었다.218) 다음은 김이순의 진술이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피난을 갔는데 경찰기동대가 군유산 중턱까지는 올라 왔는데 더 이상은 올라오지 못하고 총만 쏘았습니다. 그러다 반란군이 어디 론가 빠졌다는 얘기가 돌고 난 뒤에야 경찰기동대가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경찰은 군유산에서 피난민을 집결시키고 행색이 이상한 사람은 골라내어 일 렬로 세우고 총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머리카락이 길었는데 이 때문에 경찰에게 총살당하셨습니다.’'219) 사건 무렵 함정리 청계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김점례는 “김이순의 집안 형편 이 어려워 이리저리 다녔는데 사건 무렵에는 청계마을에 살았다. 군유산작전 이 있던 날 총소리가 들려 아침 일찍 군유산에 피난을 갔다 왔는데 며칠 뒤 김이순의 아버지가 군유산에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 나이가 19살이었다”고 진술하였다.220) 또 백운리 백오마을 심안순(다-2614)과 남편 전병일은 1951년 2월 19일 경찰 이 진입하자 심안순은 딸 2명을, 전병일은 아들 2명을 데리고 군유산으로 피 난을 갔다. 전병일은 뒤따라오던 경찰의 총격에 군유산 중턱 바위 밑에서 사 망하였고 아들 태용(당시 5세)은 피난민을 따라 정상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전병일의 사망소식은 아들이 주민들을 따라 군유산 봉우리까지 갔다가 내려 와 경찰에게 총을 맞았다는 말을 해주어 알게 되었다.221) 시신은 사건 발생 2, 3일 후 군유산 바위틈에서 찾아 수습하였는데 바위틈에 있어서인지 불에 타 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시신은 현장에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선산에 이장하 216) 참고인 채회 원 진술조서(2009.3.4.) 217) 참고인 정내숙 진술조서(2009.3.31.) 218) 신청인 김이순 진술조서(2008.5.8.) 219) 신청 인 김 이순 진술조서(2008.5.8.) 220) 참고인 김점례 진술조서(2 1α>9.6.12.) 221) 신청인 심안순 진술조서(2008.8.19.) - 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