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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작전 당일 아침밥을 먹을 무렵 총성을 듣고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 노연 순은 아들 김학기를 업고 군유산 중턱부근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아들과 함께 사망하였다. 노연순의 사망 정황에 대한 신청인 김점순의 진술이다. “숙모님이 저를 업고 피난을 가다가 종조부께로 교대하여 업힐 때 총성 이 울렸고 그 총성에 우리 가족은 흩어졌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어른들은 군유산 봉우리로 데리고 올라갔고, 저도 어른들과 같이 갔다가 어둑어둑할 무렵 내려왔습니다. 동네 언니빨 되는 분아 할머니께 어머니를 보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는 옆구리에 총을 맞은 상태에서 동생 김학기를 가리 키며 ‘누가 이 놈 좀 살려주라’고 하셨답니다. 이때만 어머니를 구해드렸다 면 살아났을 것 입 니 다.’'205) 김점순의 어머니 노연순과 동생 김학기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주민 정상일 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점순의 아버지가 군유산에 피난을 갔다 와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현장을 보았던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시신을 쉽게 찾았습니다. 현 장을 목격한 분의 택호가 ‘죽기댁’인데, 김점순의 어머니가 어린 애를 보틈 고 죽기댁에게 ‘나는 총을 맞아서 죽을 것 같으니 애나 데려가 살려 주십 시오’라고 하셨답니다. 그 아이도 어머니와 함께 죽었습니다."206) 김점순은 군유산작전 후 할머니와 아버지가 가셔서 시신을 수습하여 동생 은 그 자리에, 어머니는 자작골에 매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207) 신여와 수정동 마을은 군유산의 통로이다 보니 작전 이전부터 주민들이 경 찰에게 살해되었다. 신여마을에서는 노장수의 할아버지 노동준이 1951년 2월 3일 경찰에게 살해되었고, 수정동에서는 노상숙(다-3652)의 형 노광영이 1951 년 2월,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노광영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같은 마을 거주 김용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205) 신청인 김점순 진술조서(2008.4.9.) 206) 참고인 정상일 진술조서(2009.4.21.) 207) 신청인 김점순 친숭조서(2008.4.9.) - 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