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사료집을 발간하며 함평양민학살사건이 발생한지 어언59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억울하게 희생되신 영령들의 원혼을 풀고자 진정서를 작성 하여 한국일보 광주지사에 보내자 광주 주재기자인 ‘이상문’ (李相文.광주광역시) 기자가 5월 19일 월야면 학살 현지에서 취재하여 송고한 기사가 단기 4293년 5월20일(금요일) 사회 면에 보도되고 나산면과 해보면의 학살사실도 취재하여 송고 한 기사는 서기 1960년 5월21일 상보 2면 기사로 알려졌다. 월야에서는 유족회를 구성하여 활동하던 1기의 유족회 회장 정봉규(鄭奉奎.함평군 월야면 월악라)씨와 총무 정순도(鄭順 壽.월야면 월야리)씨 등 유족회 간부들이 활발하게 양민학살 의 억울함을 국회에도 알리는 등 많은 노력을 한 결과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60년 6월 8일 ‘국회양민학 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월야면과 해보면,나산면을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5.16쿠데타로 군 인들이 정권을 잡자 유족회를 ‘이적단제’ 구성이라는 죄목으 로 규정하며 함평경찰서로 붙잡혀가서 어려움을 당하자 유족 회의 활동도 시들어 갔다. 1989년6월호 ‘신동아’ 월간지에 김영택(金永澤.동아일보 기 획위원으로 퇴임. 현 한국역사기록연구원장)씨가 기고한 「아 직도 맺힌 6.25의 한 함평양민학살사건」의 내용이 전국적으 로 알려지자 시사저널 주간지 정희상기자가 1993년 7월 8일 자에 보도하고 광주일보의 자매지 인 ‘월간 애향 ’93년9월호’ 에 「함평양민학살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지형원기자가 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