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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을 백강수(다-10812)는 백부 백판준이 군유산작전 다음날 집에 있었 는데 작전을 나온 경찰이 밥을 해달라고 하자 “마을에 여자가 없어 밥이 늦겠 다”고 대답하자 경찰이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120) 다음은 백판준의 사망사 실에 대하여 사촌동생 백충인의 진술이다. “마을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대부분 피난을 갔고 사촌형님과 같이 특별한 이유가 있는 분들만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피난을 가서 나 중에 들었는데, 그날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서 주민들에게 밥을 하라고 하 였는데 대부분 피난을 갔고 부녀자들도 없어 밥이 늦겠다고 대답하자 경찰 이 바로 총을 쏘았답니다. 그날 경찰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 이 불을 끈 다고 백조룡, 백 대윤121)도 경 찰에 게 살해되 었습니 다. "122) 지호마을 백두인(다-4417, 4989)의 어머니 최복덕과 형 백병인도 1951년 2월 20일과 2월 26일 경찰에 연행되어 살해되었다. 지호마을은 좌우익 간 갈동 때 문에 피해가 많았는데 백두인의 어머니 최복덕도 경찰 쪽에서 활동하였던 O 00 등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진술하였다. 다음은 백두언의 진술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이웃집에 000이 살았는데, 000이 손불지서 경찰과 함께 마을 앞에서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마을에 백씨, 김씨, 박씨 등이 살았는데 백씨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런데 백씨와 김씨가 감정이 좋 지 않았는데 어머니도 이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123) 군유산작전이 끝난 뒤인 1951년 2월 당시 지호마을 상황에 대하여 당시 학 산리에 거주하였던 참고인 백영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백병인은 저보다 한 살 더 많았는데 그 분은 군유산작전 다음날 경찰이 어머니를 살해하자, 산남리로 가서 좌익 활동을 한 김삼섭과 같이 숨어 있 었습니다. 백병인은 5, 6일 후 경찰이 김삼섭과 함께 총살하였습니다.00 O 집안은 알아주는 부자였습니다. 00 。이 반란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 120) “백부는 백모님이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은 데다 몸이 좋지 않은 아들까지 있어 피난을 가지 않 았습니다" 신청인 백강수 진술조서(2008.5.23.) 121) 백대윤의 제적등본을 확인한 결과 사건이 일어난 1951.2.20.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손 불면-989 122) 참고인 백충인 진술조서(2009.6.9.) 123) 신청 인 백두인 진술조서(2008.5.20.) - 6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