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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여 장동마을 거주 참고인 이육종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상길은 군유산작전 후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집결시키고 반란 군 협조자를 색출할 때 손가락질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이상길의 시신은 선산에 모셨습니다. 군유산으로 피난 간 사람과 경찰고지로 피난을 간 사 람이 서로 엇비슷하였습니다 "11이 장동마을에서 1, 2뼈1 남짓 떨어진 죽장리 수철마을 나병희(다-6'297)의 어머 니 노가염이 군유산작전이 끝난 3일 뒤에 월천리 어전마을에서 살해되어 시 신을 수습하였다. 그에 앞서 1950년 7월 23일 나병희의 아버지 나정주는 나산 면 넙태에서 보도연맹원으로 경찰이 총살하였다.111) 군유산작전이 시작되자 노가임도 가족과 함께 군유산 방향으로 피난을 갔 다. 노가임과 아들 나병희를 제외한 가족은 신광 송사리 해안마을에서 돌아왔 지만 노가임 모자는 군유산으로 갔다. 참고인인 시누이 나복동의 진술이다. “군유산작전 때 저는 부모님과 동암리를 거쳐 신광면 송사리 해안마을 노송굴까지만 갔다 왔으나 올케는 병희를 업고 군유산까지 갔었습니다. 죽 장리 당골 ‘수말댁’이 조차 병희를 업고 동네에 와서 돌려주면서 올케가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것을 말해주어 알았습니다. 오빠는 목포에서 대학 교를 다니면서 보도연맹원이었는데 경찰이 잡아다 죽였습니다. "112) 노가임의 시신은 ‘수말댁’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가족이 월천리 어전마을 에 가서 수습하였다. 다음은 아들 나병희의 진술이다. “어머니 시신은 할아버지가 어른들과 함께 월천리 어전마을에 가셔서 수 습하여 수철마을 앞 야산에 매장하였습니다. 외삼촌은 경찰이셨고, 당숙도 공직에 계셨습니다."113) 109) 신청 인 이 엽 비 진술조서(2008.5.20.) 110) 참고인 이육종 진술조서(2009.3.18.) 111) 참고인 니복동 진술조서(2009.6.13.) 112) 참고인 니복동 진술조서(2009.6.13.) 113) 선척인 나병희 진술조서(2008.7.4.) - 6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