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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습니다. 그 형님이 작전 다음날인 정월 보름날 저에게 시신을 가져오라 고 하여 가져다주었습니다. 북성리 승선마을 사거리에서 제가 시신을 찾아 왔는데 시신을 찾으러 가서보니 그곳에 시신이 엄청 많이 있었습니다."9이 신청인 김영석(정윤자), 참고인 황두채의 진술과 황두채가 김석현의 시신을 수습한 곳이 경찰에게 연행된 피난민들이 집단 살해된 북성리 승선마을 앞이 었다는 진술로 볼 때 김석현은 다른 피난민과 함께 경찰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라)죽장리 죽장리 장동마을 송복수(다-4561, 8492)의 아버지 송한용은 1951년 2월 7일 신광면 계천리 경찰고지에서, 조차 송무웅은 2월 19일 군유산작전 때 화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송한용과 송무웅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신청인 송복수는 다 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형님이 인민군점령기 인민위원회에 다녔던 것 때문에 경찰이 잡으러 다 녔습니다. 아버지는 신광면 소재지 월암리에서 잡화상을 하셨는데 설을 쇠 려고 마을에 오셨다가 경찰에 연행 후 살해되었습니다. 그 뒤 가족은 군유 산으로 피신했는데 조카 송무웅은 솜옷을 입고 있다가 작전 때 경찰이 지 른 불에 화상을 입고 치료 중 사망하여 마을 앞 공동묘지에 매장하였습니 다. 형님은 그 후 자수하여 12년을 언도받고97) 복역 후 사망하였습니다.껴8) 96) 참고인 황두채 진술조서(2009.6.11.) 97) 송병준은 195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목포지원에서 CD194깎7τ.7.τ.25. 남로당에 가입 후 같은 해 10.15.경 기금으로 나맥 5升을 細責 이철호에게 제공하였고 (2)1950.8.15.경 면 인민위원회 농림계 장에 취임하여 9.10.경까지 토지개혁 및 현물세 징수를 위한 농산물 판정사업 등에 노력하였고 @ 같은 해 10.15.경 면 黨責 김영표의 권유로 변 남지구책을 담탕한 후 11.10.경까지 세포조직 강화, 생산유격대 편성에 노력하였고 @11.11.경 면 黨 정보과장으로서 1951.1.2.까지 군경에 관한 정보 를 수집하고자 각 부락을 배회하면서 세포를 통하여 실정을 조사하여 면 당책 김영표에게 제공하 였고 @1951.1.3.경 면당 남지구책으로 전임 후 1.7.경 同黨 여맹조직부장 양일순(당시 17세)을 태 도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김영표 외 7명과 같이 북성리에서 목봉으로 난타하여 살해하였고 @1.15. 부터 3.19.까지 석창리 후방 산봉에서 봉화를 올리고 생산유격대원과 영광, 함평지역 도로 20여 개를 파괴 혹은 식량약탈 둥에 종사한 범죄를 저질러 국가보안법 제1조제3항,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제4조4호, 형법 제55조 등의 위반으로 무기지역을 선고받았다. w1951. 제 公第272號.1,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1951.5.31. 98) 선척인 송복수 진술조서(2008.5.8.) - 6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