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page

생 당시 산남리 대성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임유택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사건이 났을 때 산남리 2구 대성마을에 살았습니다. 이봉열은 북 성리 사기마을에 살았는데 이때는 소개 명령에 산남리로 나와 살고 있었습 니다. 이봉열의 고모가 우리 동네에 시집을 왔습니다. 이봉열의 사신은 가 족이 수습하여 안장하였습니다."58) 승선마을 박종두(다-10814)의 형 박종인은 경찰이 진주하기 전에 좌익의 강 요에 의하여 좌익과 함께 주면들을 연행하러 다녔다. 이 때문에 박종인은 1951년 2월 19일 군유산작전 때는 피난을 갔다가 내려와 경찰을 피해 다녔다. 3일 후인 2월 22일 박종언은 경찰에게 잡혀 승선마을 앞에서 총살되었다. 다 음은 신청인 박종두의 진술이다. “친형이나 사촌형이 경찰이 진주하기 전 어쩔 수 없이 좌익의 말을 따랐 는데 그것이 연행의 빌미가 된 것 같습니다. 형님은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 는 것을 감시하고자 보초를 서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집안 에 박석기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형님을 경찰에 밀고하였던 것 같습 니다. 형님의 시신은 저와 부모님이 수습하여 현장에 매장하였습니다. "5의 사건 당시 박종인과 한 마을에 살았던 주민 강은화는 “박종인은 군유산에 피난을 갔다가 내려왔는데 2, 3일 정도 있다가 연행되어 승선마을 앞길에서 경찰에게 죽었다. 정월 14일 반란군들 잡는다고 지서 경찰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 작전을 하였는데 경찰이 박종인을 잡아다가 총으로 쏘아 죽였다. 승선마 을 비석 앞에서 박종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하였다.6이 차경마을 박대일(다-10817)의 아버지 박강진은 ‘언제부터, 누가하였는지는 몰라도’ 경찰이 작전을 들어왔을 때 피난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모두 죽 는다고 선전하여 군유산작전이 시작되자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61)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참고인 박병규는 “군유산에서 연행된 분 중 다른 분 들은 돌아왔으나 박강진은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58) 참고인 임유택 진술조서(2009.6.9.) 59) 신청 인 박종두 진술조서(2008.5.22.) 60) 참고인 강은화 진술조서(2009.5.26.) 61) 신청인 박대얼 친숭조서(2008.5.8.) - 6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