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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2일 작전에서는 경상남도경찰국에서 배치 받은 경찰 100여 명 이 작전에 참여하였고, 다음해 2월 19일 군유산작전 또한 전라남도경찰국 기 동대가 작전을 주도하였는데 이와 같이 토벌 경찰이 지역사정에 어둡다 보니 피난민들에게 ‘토끼몰이 식’ 작전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민간인 피해가 발생 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의용경찰로 함평경찰서 토벌대원이 었던 임봉업은 군유산작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군유산작전은 경찰국 기동대가 주도하였는데 기동대 1개 대대로 병력 수는 최소 1501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본국 기동대는 군유산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었습니다. 사건 당일 군유산 골짜기가 피난민들로 꽉 차 있다 보니 경찰은 민간인이고 뭐고 간에 보이는 대로 총을 쏘았고 그래서 피해가 그렇게 크게 발생한 것입니다. "46) 다. 군유산작전 이전 손불, 신광면의 장황 국군이 주둔하면서 주도적으로 수복작전을 폈던 월야 · 해보 · 나산면과는 달리 손불과 신광면은, 1951년 2월 19일에야 마을단위 수복이 완료되었다. 함평경찰서 기동대는 1950년 12월 12일 손불면 양재리에서 신광면 함정리에 이르는 군유산 인근의 미수복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고 이후 군유산작전까 지 소규모 병력으로 진주작전을 벌였지만 마을에 정보가 취약한 경찰은 빨치 산의 저항으로 진주하지 못하고 진입과 퇴각을 반복하였다.47) 다음은 송사2리 삼천동 주민 주육손의 진술이다. “삼천동에는 무안에서 올라온 지방좌익인 무호대만 있었습니다. 무호대 는 생산유격대여서 대장도 총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불갑산 본부의 빨치산이 동네에 와서 한 번씩 자고 갔는데 그러면 경찰이 어떻게 알고 마 을 앞까지 들어왔습니다. 경찰은 불갑산 빨치산이 총 몇 방 쏘면 바로 나 가버렸습니다. 군유산작전 때까지 양쪽은 이렇게 전투시늄만 냈습니다껴8) 손불면과 신광면의 미수복지역 주민들은 평소 “경찰이 작전을 들어오면 모 46) 참고인 임봉섭 진술녹취(2008.9.21.) 47) 이 사건 보고서 182쪽 〈사건 지역도 2 손불면〉 참조 48) 착고인 주육손 톡화보고(2α)9.10.7.) - 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