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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번지로 리 인민위원장의 집이었는데 그곳에는 생산유격대 1개 중대 40, 50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경찰이 음력 11월 4일(양력 12월 12일)에 처음 들 어왔는데 그날은 반란군에게 쫓겨 마을에 불만 지르고 갔습니다. 이와 같 은 생활이 정월 14일(양력 2월 19일)까지 계속되었고 경찰이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들은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내려오곤 하였습니다."45) 군경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빨치산불갑산지구사령부 빨치산도 면사무소와 지서 등을 공격하면서 경찰과 교전하였다. 다음은 『한국경찰일일보고서 1 .JJ (1951.1.10-4.30.)에 나온 주요 상황이다. o 1951. 1. 13. 10:00 손불면 북성리의 적 병력 130명이 주포지서를 습격하 자 주포지서 경찰이 반격하여 사살 12명, 생포 1명 및 비밀문서 획득. o 1951. 1. 26. 15:00 나산면 구산리에 80명의 적 출현, 경찰 2개 소대가 출 동하여 적 7명 생포 및 비밀문서를 획득하였으며 경찰 1명 전사. o 1951. 1. 31. 05:00 99식 소총 등으로 무장한 70명의 적이 해보면 대각리 에서 손불면 북성리에 침투하자 경찰 2개 소대가 출동하여 적 13명을 사살하 고 가빈 1정, 러시아제 소총 3정 등을 획득. o 1951. 2. 11. 08:00 무장 30명을 포함한 적 70명이 나산-함평도로에 출현 하자 이에 대응하여 경찰 출동하여 적 18명 사살, 방위대원 2명 전사, 2명 부 상하였으며 농가 3채 소각. 이상에서 보듯 군유산작전 이전 경찰과 빨치산은 몇 차례 교전하였지만 빨 치산이 업었던 손실에 비하면 경찰의 피해는 미미한 편이었다. 즉 군유산작전 이전에 이미 빨치산은 경찰에게 위협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경찰은 적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였고 현지 사정에 어두운 경찰국 기동대와 신규병력인 함 평경찰서 기동대가 작전을 담당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무리한 작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5) 참고인 박병규 진술조서(2009.3.19.) - 665-